예레미야애가 5:1-14 찬송가: 523장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황폐해 버린 예루살렘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는 말씀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는데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된 이유는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1절 말씀이 자칫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멸망으로 당하는 고난이 당하지 않았어야 하는 억울한 일이었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심판하신 하나님께 불평하는 고백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고백은 회개를 전제로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없어지다’는 단어는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담당하다’는 단어는 ‘임신하다, 짐을 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의 조상들이 죄를 범죄함으로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임신하여 죄를 행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내일 말씀에 있는 16절을 보면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어졌던 영광과 위엄을 우리가 범죄함으로 떨어뜨려 버렸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용서는 회개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 혼자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남은 자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자신의 문제를 간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공동체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공동체의 문제와 기도 제목을 위해서 합심하여 간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벽 제단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그런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절을 보면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다’고 말씀하면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과 집들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가 되었고 우리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과부와 같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버림 받은 의지할 대상을 잃어 버린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존재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멸망을 당한 유다의 상태가 바로 고아와 과부와 같이 의지할 것이 없는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바벨론에서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게 한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예레미야 39장을 보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 된 후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포도원과 밭을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리한 세금을 징수함으로 남아 있는 자들이 이전에는 값없이 마시고 가져 올 수 있었던 물과 나무를 값비싼 은을 주고 사야 하는 상황이 되어 목을 눌러 숨을 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힘든 상황을 벗어나 보기 위해서 애굽과 앗수르에게 손을 벌렸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7절 말씀과 연결지어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으로부터 살 길을 모색한 일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힘있는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행함으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8절에 종들이 우리를 지배하였다는 말씀은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 가고 바벨론 왕의 신하가 유다를 다스리는 상황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들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낼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이라는 단어가 ‘가뭄’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두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 생명을 빼앗는 도적의 칼이 있다는 의미와 먹을 것이 부족한 광야에 가뭄이 있어서 양식을 구하는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 먹을 것이 없는 굶주림이 극심한 상태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굶주림 뿐만 아니라 11절을 보면 대적들이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는 백성들의 지도자들도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적자들의 손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하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할 정도로 고문을 당해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청년들이 노예와 같이 맷돌을 돌리었고 어린 소년들은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는 고통과 슬픔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절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애가는 슬픔과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께로 돌이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회복과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일 말씀인 21절을 보면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때 우리가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때 우리가 다시 새롭게 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믿는 자에게도 고난과 고통은 절망이 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시며 구원의 은혜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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