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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7-47  찬송가: 285

 

베드로의 설교가 끝나자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찔렸다는 것은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마음이 심한 고통 가운에 빠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라 직,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참여하였거나 방관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은 출애굽기 23장의 말씀을 따라서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이기 위하여 성전에 모였던 사람들로 5절을 보면 이들을 경건한 유대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 기간에도 성전에 모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종료나무 가지를 들고 찬양을 했거나, 후에 예수님을 향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를 질렀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난 후 이들은 자신들이 삽자가에 죽이라고 외쳤던 예수가 바로 주와 그리스도, 메시야가 되신다는 것을 깨닫자 죄책감과 양심에 가책에 사로잡혀 마음이 고통스러웠고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사도들에게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먼저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가 마음에 찔린 상태, 즉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죄를 깨닫는 죄책감만으로는 안되고 마음이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각각 이라는 말씀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개인의 죄는 한 개인의 회개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는 말씀은 베드로가 36절에 말씀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믿는 각 사람이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는다는 의미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받으라는 단어는 동사가 아니라 전치사로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죄사함을 받기 위하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침례를 받았는데 베드로는 그것이 죄에 대해서 완전히 사함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길은 자신의 죄를 회개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랬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씀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각 사람에게 내주하시기 위해서는 죄가 없이 깨끗해야 하고 또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9절의 이 약속은 요엘서에서 성령을 주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으리라는 언약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누구든지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이방인들을 포함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면한 다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게 되는데 이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없이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하는 것을 의미하고 신도라는 단어는 생명이라는 뜻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가 삼천이나 더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42절 이하의 말씀은 이들이 구원을 받은 후에 보인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의 모습들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에 힘을 썼는데 사도들의 가르침은 서로 교제하는 것이며 떡을 떼는 것이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말씀처럼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들이 교회를 세워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사도들로 통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람마다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하는 말로 믿음을 갖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으면서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고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하는데 사도행전 5:12절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의 행각”에 모였다고 말씀하는 것을 통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였던 예배 장소가 솔로몬의 행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솔로몬의 행각에서 행각은 광장, 현관이라는 의미로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에는 없던 이름이었는데 헤롯 대왕이 성전을 증축하면서 공간을 넓혀 성전 바깥 쪽에 광장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 공간이나 넓힌 현관을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 마당을 이방인의 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니까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는데 여기에 교회라는 단어가 원문에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교회를 통하여 나타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증가하도록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저희 교회에도 넘쳐서 구원 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해져 가는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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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22-36   찬송가:27장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들으라’는 단어는 구약의 핵심 단어 가운데 하나인 ‘쉐마’와 같은 의미입니다.

‘쉐마’는 주의를 기울여 들으라는 명령어인데 베드로는 ‘쉐마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아 당신들은 이 말씀을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라고 명령을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되는데 그 주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하여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심으로 너희에게 그를 증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증언하다’는 말은 나타내 증명해 보이셨다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주가 되신다는 것을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이적과 표적을 통해 증명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3절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으며 미리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은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는데 그 이유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이유를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을 하는데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고백한 말씀이 바로 그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은 시편 16:8-11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다윗이 주라고 고백한 그 분이 바로 메시야이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예언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라는 말씀에서 여기서 ‘뵈었다’는 단어는 ‘미리 본다, 미리 안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 단어가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고백은 항상 주께서 내 앞에 계실 것임을 미리 보았고 알았다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이 단순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계시의 말씀을 담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26절에서 이어지는 다윗의 고백을 보면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소망 안에서 안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2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영혼을 지옥에 가도록 버려지 아니하시며 영원히 썩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생명 가운데 거룩하게 살게 해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28절을 보면 다윗은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이셨다’는 단어는 ‘확증해 주셨다’는 의미로 주께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내게 확증해 주셨기 때문에 주 앞에서 나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다윗을 통해 예표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베드로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다윗을 선지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없는데 베드로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은 다윗의 후손으로 왕권을 가진 메시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는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않는 부활의 몸을 입고 다시 사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32절을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고 말씀하면서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대로 이 모든 일을 성취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하심으로 권능을 받은 제자들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임재하심을 통하여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3절을 보면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의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윗의 육신은 썩어져 부활의 몸으로 천국에 올라가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또 다른 시편인 시편 110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6절을 보면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면서 말씀을 마치고 있습니다.

 

주와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가 예수님이시며 구원을 이루시는 주인 되신 하나님이 바로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유대인이든지 흩어져 있던 사람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누구든지 주의 이름 다윗이 고백했던 그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는 이제 주님께서 사명으로 주신 주님의 증인이 되어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증인이라는 단어를 보면 ‘순교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붙잡힐 것이 무서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고 잡힐까봐 숨어 있었던 베드로였지만 그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는 주님의 증인으로 일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교회가 새벽제단의 기도의 용사들이 베드로와 같이 주님의 증인으로 일어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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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4-21   찬송가: 183장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방언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자 그곳에 모여 사람들이 소동하여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오순절을 맞이하여 각처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어제 말씀을 보면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 등에서 태어나 그곳의 언어에 익숙한 유대인들의 큰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자신들이 태어난 지역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다 놀라고 당황하여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하게 됩니다.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은 지금의 촌놈과 같이 배우지 못한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이 각 나라의 언어들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듣게 되니까 ‘이것이 어찌 된 일이냐’고 하면서 놀라고 당황하였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반응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하는 세상 사람들의 반응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이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놀라거나 당황을 하든지, 세상의 과학이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고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랬을 때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5절을 보면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제 삼시는 유대의 시간으로 지금으로 하면 오전 9시를 의미합니다.

지금 시간이 제 삼시, 오전 9시인데 우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시간을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제 삼시는 유대인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 중 세 번 기도시간을 정하여 기도하였는데 제삼시, 육시, 구시였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오전 9시, 오후 12시, 그리고 오후 3시입니다.

 

베드로가 제 삼 시라고 구체적으로 시간을 밝힌 것은 우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며 기도하는 시간에 제자들이 술에 취하였다 조롱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있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유대인들이 정말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하는데 그것은 요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각 나라의 언어들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은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요엘 2장에서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요엘 2:2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엘서에서는 ‘그 후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말세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는 마지막 때를 의미하는데 성경을 보면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고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의 사이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말씀하시며 성령의 임재하심이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이루어지는 일이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강림하심이 있었고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예언을 말하고 능력을 행하셨던 말씀을 볼 수 있있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능력을 나타내 보이신 적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야 성령님이 보내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임재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전의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능력은 그 사람 위에 머물렀다는 ‘up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임하시는 성령의 임재하심은 거하다, 내주하다는 ‘dwell’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셔야 성령을 보내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비로서 성령이 믿는 자 안에 내주하시는 임재하심의 은혜가 임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가 인용하는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요엘서의 말씀이 같은 의미가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로 말미암아 은사를 받은 자들을 말씀하는데 그 대상을 보면 ‘자녀들, 젊은이들, 늙은이들,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실 것을 말씀하면서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에 상관없음을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하여 나타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9절과 20절을 보면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일어날 징조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라’는 것입니다.

20절에서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이와 같은 징조들이 나타남으로 마지막 때가 임하게 될텐데 그 때에 2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1절 말씀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여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요엘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원의 은혜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보내신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말씀하면서 이제 누구든지, 유대인이든지 흩어져 있던 사람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워서 종들에게조차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고, 자신도 잡혀서 예수님처럼 될까봐 숨어 있었던 베드로였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권능이 임하게 되니까 이제 세상을 향하여 더 이상 무서워하지도 부끄러워 하지도 않으며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하심과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하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세상을 향해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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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5:1-14  찬송가: 523장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황폐해 버린 예루살렘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는 말씀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는데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된 이유는 유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1절 말씀이 자칫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멸망으로 당하는 고난이 당하지 않았어야 하는 억울한 일이었고,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심판하신 하나님께 불평하는 고백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고백은 회개를 전제로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우리의 조상들은 범죄하고 없어졌으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없어지다’는 단어는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담당하다’는 단어는 ‘임신하다, 짐을 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의 조상들이 죄를 범죄함으로 치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임신하여 죄를 행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내일 말씀에 있는 16절을 보면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주어졌던 영광과 위엄을 우리가 범죄함으로 떨어뜨려 버렸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용서는 회개 없이는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통렬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 혼자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남은 자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자신의 문제를 간구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우리의 공동체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공동체의 문제와 기도 제목을 위해서 합심하여 간구하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벽 제단에서 부르짖는 기도가 그런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절을 보면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다’고 말씀하면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과 집들을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 없는 고아가 되었고 우리의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과부와 같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버림 받은 의지할 대상을 잃어 버린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존재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멸망을 당한 유다의 상태가 바로 고아와 과부와 같이 의지할 것이 없는 버려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나무들을 가져오며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기진하여 쉴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바벨론에서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게 한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예레미야 39장을 보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 된 후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을 유다 땅에 남겨 두고 포도원과 밭을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리한 세금을 징수함으로 남아 있는 자들이 이전에는 값없이 마시고 가져 올 수 있었던 물과 나무를 값비싼 은을 주고 사야 하는 상황이 되어 목을 눌러 숨을 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지금의 힘든 상황을 벗어나 보기 위해서 애굽과 앗수르에게 손을 벌렸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7절 말씀과 연결지어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으로부터 살 길을 모색한 일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힘있는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의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행함으로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8절에 종들이 우리를 지배하였다는 말씀은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으로 끌려 가고 바벨론 왕의 신하가 유다를 다스리는 상황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들의 손에서 우리를 건져낼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칼’이라는 단어가 ‘가뭄’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두 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 생명을 빼앗는 도적의 칼이 있다는 의미와 먹을 것이 부족한 광야에 가뭄이 있어서 양식을 구하는 일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 먹을 것이 없는 굶주림이 극심한 상태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래서 10절을 보면 ‘굶주림의 열기로 말미암아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굶주림 뿐만 아니라 11절을 보면 대적들이 부녀자를 강간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는 백성들의 지도자들도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적자들의 손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하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할 정도로 고문을 당해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청년들이 노예와 같이 맷돌을 돌리었고 어린 소년들은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는 고통과 슬픔의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절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애가는 슬픔과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께로 돌이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회복과 구원의 은혜를 간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일 말씀인 21절을 보면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때 우리가 주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실 때 우리가 다시 새롭게 되는 회복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믿는 자에게도 고난과 고통은 절망이 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시며 구원의 은혜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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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4:11-22  찬송가: 279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여부스 족속이 있었던 예루살렘은 천연적으로 요새였기 때문에 점령하지 못한 땅으로 남아 있었는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곳을 다윗성, 시온성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형적인 위치가 천혜의 요새였으며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랬던 예루살렘이었는데 대적과 원수들이 들어와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말았는데 그 원인을 1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2절을 보면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성전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절대로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할 때 그렇게 하시겠다는 약속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을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선포하고 제사를 통하여 백성들의 거룩을 담당해야 할 영적 리더들이 죄에 빠른 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와 의인들의 말을 듣기 싫어해서 그들을 죽이고 피를 흘리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죄를 말하면 교인들이 교회에 오기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 축복을 말하고 성공을 말해야 교인들이 좋아하고 부흥을 한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만 말하는 교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 예루살렘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 말씀하는 ‘그들’은 13절에서 말씀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맹인 같이 방황하였으며 거룩해야 할 그들의 예복은 피로 더러워져서 만질 수도 없을 정도로 부정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거짓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죄를 행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은혜의 말씀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의 말과는 반대로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도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할 것이라’고 조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잠언 29장을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방자히 행하다’는 말은 멸망의 길로 간다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영적 지도자들이 타락을 하게 되자 백성들이 멸망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른 번역본을 보면 앞에서 말씀하는 그들과 뒤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들이 서로 다른 그들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여호와께서 노하신 그들은 앞에서 말씀하였던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의미하고 뒤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들은 흩어진 제사장과 장로들을 대접하지 않는 침략자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죄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는데 일조했던 제사장과 지도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어 버리시고 돌보지 아니하셨으며 침략자들도 제사장과 장로들을 높이거나 대우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17절을 보면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도움을 바랬던 대상은 ‘애굽’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 37장을 보면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오자 예루살렘을 에워쌌던 갈대아인들이 그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을 떠나자 하나님께서 바로의 군대는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를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럼에도 애굽이 유다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은 구원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8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다’는 것입니다.

 

20절은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예레미야 39장과 52장에서 말씀한 것처럼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포위 당하자 시드기야 왕이 성을 빠져 도망을 가다가 붙잡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는 날까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21절은 유다의 멸망을 오히려 협조했던 에돔에 대해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딸 시온의 회복을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를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의 죄악을 벌하시고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시며 유다를 향하여서는 회복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회복케 하시고 지켜 주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임하는 오늘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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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4:1-10  찬송가: 379장

 

오늘 본문 1절에서 ‘슬프다’라는 단어를 보면 ‘어떻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죄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원래 금은 변하지 않은 습성을 가지고 있어서 존귀하게 여기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평가를 받는데 그런 금이 빛을 잃고 변질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변질하다’는 단어는 ‘속성이 변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금의 속성을 잃어 버려 더 이상 금이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성소를 이루는 벽돌과 같았는데 거리 어귀마다 쏟아진 돌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의 벽돌과 같던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파괴되고 멸망을 당해 거리에 나뒹구는 쓸모 없는 돌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어찌 그리’라는 단어가 1절에 ‘슬프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어떻게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었는데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느냐’는 말씀입니다.

순금과 흙을 비유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순금과 같이 보배롭고 존귀한 시온의 아들들이었는데 토기장이가 항아리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흙처럼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들개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와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개라고 번역된 단어가 ‘괴물, 바다괴물’로도 해석이 되는데 이 짐승의 특징은 잔인하고 새끼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습성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개는 자기 새끼를 먹이기 위해 젖을 주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금의 상황은 그보다 못한 광야의 타조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타조의 특성은 광야에 알을 낳은 뒤 방치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다못해 이 들개도 젖을 주어 자기 새끼를 먹이는데 백성들은 잔인하여 자기 새끼를 방치해 버리는 타조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을 보면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이 황폐해져서 먹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으며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 되니까 굶주린 갓난 아이와 어린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는 무자비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2장에서 ‘여인들이 자기 손에 든 아이를 먹었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식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먹는 짐승보다 못한 잔인한 모습이 지금 예루살렘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다’고 말씀하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서 의식주의 걱정이 없었던 백성들이 음식을 구할 수 없고 거리로 나앉았으며 거름더미에서 살아가는 비참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 죄로 인한 결과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 가운데 가장 죄악이 만연했던 장소를 언급할 때 ‘소돔’이라고 말을 합니다.

소돔은 음행과 더러움으로 세상의 모든 죄의 소굴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죄가 만연했던 소돔은 소돔성 안에 있던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간구에도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사람이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결국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내리심으로 순식간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결코 가볍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죄는 경중을 따질 것 없이 그에 대한 심판은 죽음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는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을 말씀하실 때 제일 첫 번째 계명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악을 버리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소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서 육신의 정욕대로 행하는 죄를 범하였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며 우상을 섬기는 패역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숭배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7절과 8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들이었을 때는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 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과 같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불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과 10절에서는 ‘칼에 죽은 자들이 굶어 죽는 자들보다 낫다’고 하면서 토지 소산이 끊긴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말씀하면서 그로 인하여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을 보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말씀하면서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풍요를 쫓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며 우상을 섬기다 결국 심판으로 멸망을 당한 처참한 광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열매가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절을 보면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흠없이 보전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최우선이 되시며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온전하고 거룩함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가시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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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55-66  찬송가: 363장

 

오늘 본문 55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라고 부르짖하고 있는데 이 때의 상황을 예레미야 38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루살렘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이지만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방백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해를 구하고 있으니 이 사람을 죽여 달라’고 말을 합니다.

그 이유가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시드기야 왕은 ‘내가 너희의 말을 조금도 거스릴 수 없다’고 하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던져 넣고 굶어 죽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주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는데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반역하는 반역자로 취급을 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깊은 구덩이어 던져 죽이려고 하였으니 예레미야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거나 시련을 겪을 때 보여야 할 믿음의 반응인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기도에 바로 응답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간구를 하였음에도 하나님께서 귀를 가리고 계신 것 같이 아무런 기도의 응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지 않습니까?’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가리지 마시고 응답해 주세요’라고 간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57절을 보면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기도는 그냥 자신의 상황이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야 한다고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의 기대나 바램을 구하는 것도 기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것 보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능력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8장을 보면 구덩이에 갇혔던 예레미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시드기야 왕으로부터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자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사람들에 손에 붙이지도 않겠다’는 약속을 받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58절을 보면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해 주신 적이 있으시지 않습니까?’라고 그 때 당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것을 언급하면서 지금의 현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가 앞으로 당할 수 있는 또 다른 시련과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밑거름이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주셨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에 지금 당하는 이 환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59절을 보면 ‘여호와의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 주옵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당하는 원통함은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백성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 상황을 의미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에 항복을 하라고 선포하는 것은 바벨론이 좋거나 친바벨론파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을 당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예언한 대로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에 멸망을 당한 지금의 상황이 원통할 일이라고 고백하며 그것을 풀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내 말을 듣지 않더니 꼴 좋다’고 비웃었을 것 같은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통 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예루살렘을 향한 공격이 자신을 향한 보복이며 공격으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0절을 보면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으며 6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라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가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셨듯이 유다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바벨론의 악을 하나님께서 보셨으니 그들이 행한 대로 보응을 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간구는 자신의 한을 하나님께서 풀어 달라는 한풀이가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하시고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 주권을 가지시고 통치하시기를 기대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6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려 달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판단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66절을 보면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라고 간구하면서 악을 행한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간구가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하심과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쓰임 받는 우리의 기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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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2:18-22  찬송가: 543장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의 기도를 드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들의 마음이 주를 향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죄를 범한 인간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하였는데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기 보다 자신의 죄를 가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부르짖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를 쉬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의 부르짖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쉬지 말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부르짖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9절에서도 ‘초저녁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라고 말씀하면서 회개의 기도는 정해진 시간이나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까지 끈질기고 진실된 마음으로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회개를 너무 쉽고 가볍게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셨는데 우리는 내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치는 기도를 하는 것으로 다 끝난 것처럼 죄를 가볍게 볼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의 손길을 거두시고 용서하실 때까지 얼마나 통렬한 회개가 있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 길 어귀에서 주려 기진한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2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의 낳은 아이들을 먹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에워싸자 사마리아 성 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졌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삶아 먹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을 한 뒤 성에 먹을 것이 없게 되자 그와 같은 일이 또 다시 자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어떻게 그런 극악무도한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이다 눈에 뵈는 게 없어지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영적 분별력이 사라져 버려 죄의 본성만 남아 버린 자의 극단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들을 자신의 배를 채우는 대상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이 백성들을 미혹하였던 거짓 선지자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면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어 더 이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한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52장을 보면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과 고관들의 집이 불살라지고 예루살렘 성벽이 파괴되었고 성전 안에 있던 기물들을 다 노략하여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성 안에 남아있는 자를 사로잡아 갔고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칼에 죽임을 당하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1절 후반부를 보면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다’고 말씀하면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신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2절을 보면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기가 되면 사방에 흩어져 있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여들었는데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불러 들이셔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 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이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씀하는 이유는 무자비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원망을 하는 말씀이 아니라 죄로 인한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죄는 간과하거나 묵인될 수 없으며 대가와 책임이 없는 용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회개를 통해 사함 받지 않은 죄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책임과 결과를 져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고 죄에 대해서 안일하게 반응하지 않고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16절을 보면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3:19절을 보면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와 싸우시는 인생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서 하나님 앞에서 유쾌하게 되는 우리의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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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2:11-17  찬송가: 343장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을 하는데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얼마나 울었는지 ‘내 눈이 눈물에 상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하다’는 단어는 ‘소비하다, 다 써버리다’는 의미로 눈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다 소비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극도의 고통과 슬픔을 표현하는 것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기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그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기절하여 그의 어머니들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머니들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냐’고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몸이 쇠약해져 버린 아이들이 그들의 어머니 품에서 죽어가면서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어 결국 어머니 품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에는 눈물이 끊어지지 않고 슬픔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죄의 결과로 당연한 죄값을 받는다고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죄의 영향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13절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딸 예루살렘,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하여 어떤 위로의 말을 하고 싶은데 그들의 고난과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무엇으로 비교하여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너의 파괴됨이 바다 같이 큰데 누가 너를 고쳐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심판을 받아 황폐하게 되고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고통이 너무 커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을 흘리며 고통 중에 슬퍼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그들을 고쳐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4절을 보면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가 사로 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목에 멍에를 매고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선포를 하였는데 선지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있는 멍에를 꺽어 버리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어 버리셨다’고 선포합니다.

백성들에게 헛되고 어리석은 거짓 묵시를 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에 대해서 다수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처럼 치부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벨론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바벨론에 멸망 당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돌이키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까지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격려의 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는 전혀 거리가 먼 ‘거짓 경고와 백성들을 미혹하게 하는 말’이었고 결국 심판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15절에 ‘모든 지나가는 자들’은 유다의 주변 국가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고 ‘박수 치며 딸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라고 조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영광이라, 모든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고 말을 한 주체가 유다가 아닌 ‘사람들, 그들’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인도해 주실 때에는 이스라엘이 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악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되니까 이제 그 칭송이 조롱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6절을 보면 원수들까지 멸망한 유다를 향해 비웃고 조롱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고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하는 말을 보면 유다의 멸망에 대해서 ‘우리가 그를 삼켰다’고 말을 하면서 자신들이 유다의 파괴에 주체가 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실제로 유다의 멸망을 주도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의 멸망을 원하고 있었는데 유다가 멸망을 당하게 되니까 그것을 간절히 원했던 자신들의 뜻대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던 유다의 멸망의 날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발견하니까 그것이 너무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유다를 향하여 경고하셨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그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무너뜨리사 원수가 너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며 네 대적자들의 불로 높이 들리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시고 그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는 갑작스럽게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옛날부터 명령하셨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며 ‘네가 만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네가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며 대적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고 여호와의 이름이 너를 위하여 불리는 것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또한 ‘네가 만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저주를 받고 재앙이 너를 따라서 진멸하게 하실 것이며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후서 3:9절에서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래 참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이며 사랑하니까 그렇게 살아도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원수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체험하느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저주와 심판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함으로 축복과 영광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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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2:1-10  찬송가: 278장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의 구름을 담으셨는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시온은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은 예루살렘의 한 성읍이었는데 다윗성으로도 불리기도 하였고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시편을 보면 시온이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임하는 장소로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야 할 시온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구름으로 덮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사용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40장을 보면 회막 위에 구름이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구름이 덮임과 같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 구름을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야 할 시온이 하나님의 진노의 구름으로 가득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절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영광’이라는 의미로 ‘이스라엘의 영광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땅에 내동댕이 쳐졌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발판은 발등상으로 ‘주의 발등상’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시편 99:5절을 보면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시편 132:7절에서도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발등상’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성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는 예루살렘을 진노의 구름으로 뒤덮였을 뿐만 아니라 성전까지도 기억되지 못하고 파괴되어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는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는 ‘딸 시온’,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있으며 2절을 보면 ‘야곱’, ‘딸 유다’가 있고 3절에서는 ‘이스라엘’, 10절에서는 ‘예루살렘’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거의 모두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이스라엘에 부분적으로 임하는 심판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2절을 보면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으며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고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3절에서는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 들이셨다는 것은 원수가 강해서 유다가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거두어 버리셨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구원의 은혜를 거두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 ‘딸 시온의 장막’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떠난 성전은 더 이상 은혜의 장소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과 7절을 보면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제단을 버리며 성소를 미워하시며 원수의 손에 넘기셨다’고 말씀하면서 하나님께 경배와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파괴해 버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기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이 절기와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며 제물을 바쳤지만 우상과 죄악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며 죄악에 빠른 발이 되어 살았던 것입니다.

 

마음이 떠나고 형식만 남은 절기와 안식일을 하나님께서 진노의 날에 모두 파괴해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이며 이스라엘 백성만이 참여할 수 있었던 제사와 절기였지만 거룩을 상실하고 죄악에 물들어 버리자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바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는 심판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하게 되어 영적 암흑 상태가 되어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린 후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고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픔과 애통을 가장 크게 드러낼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지금 당하는 고통과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표현해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자신들의 죄를 참회하고 회개할 때도 사용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이미 임하고 난 뒤에 때늦은 후회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이, 하나님의 성이라 불렸던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을 상징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이들을 구원하는 도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우선이 되어야 했는데 하나님과 말씀은 버리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산성이라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하고 있다고 하나님의 구원을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영광이 떠나 버리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에서 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죄악을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버린 하나님의 시온성,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경건의 모양만 있는 껍데기와 형식적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라 항상 주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고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거룩한 산제물로 드릴 수 있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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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1:18-22  찬송가: 400장

 

예레미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왕과 백성들은 그런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예레미야 선지자를 매국노와 같이 취급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경우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결국 남유다는 시드기야 왕 11년째가 되는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한 유다를 바라보며 슬픔과 고통을 노래하는 말씀이 예레미야애가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어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시어 부서버리셨다’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악의 멍에로 목까지 감아 버리신 후에 대적자들의 손에 넘겨 버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 말씀에서는 ‘주께서 내 영토 안 나의 모든 용사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청년들을 부수심이여 처녀 딸 유다를 내 주께서 술틀에 밟으셨다’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되었고 회복시켜 줄 자도 없으며 위로해줄 자도 없게 되었음을 탄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된 것은 회개하지 않는 죄에 대한 심판이셨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죄에 대한 심판은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으로 우상을 섬기고 죄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지 않을 거라는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보호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죄악을 행하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즉각적으로 심판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내하시며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셔서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보다 죄에 발이 빨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은 안타까움과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가 자신의 불순종과 자신의 반역으로 한한 결과였다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백성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진노가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씀하는 ‘나’는 예레미야 본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예레미야와 함께 하나님의 진노로 심판을 받은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처녀들과 청년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9절에 ‘내가 내 사랑하는 자들을 불렀으나 그들은 나를 속였다’는 말씀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고 있는 주변 국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그들이 돕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배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목숨을 회복시킬 그들의 양식을 구하다가 성 가운데에서 기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바벨론과 맞써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던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양식을 구하지 못해 성 안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20절에 ‘여호와여 보시옵소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외침으로 예루살렘이 당하는 심한 고난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하는 말씀입니다.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을 원문대로 해석을 해보면 ‘내 창자가 뒤틀렸고 나의 마음이 뒤집어졌는데 이는 나의 고통이 심히 크기 때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밖에서는 여전히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가고 집 안에서는 죽은 것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21절에 그들은 주변 국가들을 의미하는데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지만 위로하는 자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예루살렘이 당하는 재난을 보고 주께서 그렇게 행하신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비웃는 대적들에게도 임하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는 ‘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다’고 간구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양심에 화인맞은 자처럼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전혀 회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뻐하고 비웃는 죄인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죄를 간과하시지 않고 공의로운 심판을 하시는 주권자가 되심을 나타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죄인들에게는 심판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바벨론을 심판하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에게 고통이 될 수 있지만 그로 인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죄의 심판의 결과로 하나님의 공의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옴으로 하나님의 긍홀하심과 사랑 안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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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9:16-30  찬송가: 516장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왕권을 잃고 도망을 갈 때 다윗을 저주하였던 시므이와 시바의 속임수 때문에 다윗을 따르지 못해 서운하게 했던 므비보셋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 요단에 이르렀을 때 베냐민 사람 시므이가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을 맞으러 내려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다 사람을 그 유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유다 사람이 유다 지파인 다윗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인이나 친인척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과오를 덮어 보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 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는지 17절을 보면 ‘베냐민 사람 천명과 함께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므이가 베냐민 사람 천 명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베냐민 지파에서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천명이나 대동한 것은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다윗에게 했던 잘못을 사죄하고 다윗에게 충성하겠다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천명의 눈이 있으니 자신을 쉽게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사울 집안의 종이었던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바가 시므이와 함께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므이가 베냐민 지파이고 사울도 베냐민 지파였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연관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시바는 다윗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번에도 므비보셋보다 앞서서 그의 온 가족을 대동하고 다윗을 맞이하기 위해서 재빠르게 달려 나온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이 요단을 건너 유다로 들어오기 전에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밟고 건넜다는 말씀은 요단 강이 말라서 그 위를 밟고 건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돌진하다’는 의미로 다윗을 만나기 위해서 요단 강이 장애물이 아닌 것처럼 돌진하듯이 서둘러 다윗에게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18절을 보면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요단 강을 건너는 다윗에게 잘보이기 위해서 왕의 가족과 왕이 좋게 여길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와서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왕 앞에 엎드려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였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다시는 왕권을 회복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였을 때는 돌을 던지며 저주를 하다가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니까 자신의 행동에 마음쓰지 말라고 하면서 내 잘못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선물을 들고 나왔지 않느냐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행동을 보면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다윗에게 왔다기 보다는 다시 힘을 가진 다윗에 의해 자신의 지난 행동이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살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베냐민 사람 천 명 앞에서 내가 이렇게 잘못을 구하면 사람들 눈도 있으니 쉽게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시므이가 저주할 때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느냐고 하면서 죽이려고 했던 아비새가 ‘여호와이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죽어야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너희가 오늘 나의 원수가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윗이 도망을 갈 때 저주하는 시므이를 살려둔 것은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통하여 내리시는 징계로 받아 들였기 문에 시므이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라고 시므이가 밉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죽을 때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시므이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고 그의 백발이 피 가운데 스올에 내려가게 하라고 말할 정도로 가슴에 사무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다시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마자 자기 백성을 죽이는 자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대로 일을 처리하기 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고 용서해 주는 관용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4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므비보셋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는데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고통과 고난에 동참하겠다는 의지이며 마치 자녀가 아비의 고난에 대하여 애통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므비보셋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므비보셋의 종이었던 시바의 모함 때문이었는데 다윗이 도망갈 때 시바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주면서 므비보셋이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릴 것이라고 말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시바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고 서운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은 ‘내가 다리를 절기 때문에 나귀에 안장을 지워 왕과 함께 가려고 하였는데 내 종이 나를 속이고 모함을 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시바에게 속아서 재산을 시바에게 준 것에 대한 억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에게 베풀었던 은혜와 다윗이 무사히 왕궁에 돌아온 것에 대한 감사를 말하면서 다윗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29절을 보면 다윗이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므비보셋의 변명을 듣기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므비보셋이 말한 것을 이해했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바와 밭을 나누라’고 결정을 내립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주었던 모든 재산을 므비보셋에게 환원하지 않고 절반만 돌려주라고 말을 한 것은 공평하지 않은 판결처럼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므비보셋을 속이고 모함한 시바에게 절반의 재산을 준 것은 도망가는 힘든 시기에 시바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호의와 자신이 한 약속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재산으로 보면 므비보셋에게 손해일 수 있지만 틀어졌던 다윗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21장을 보면 사울이 피흘린 것으로 말미암아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사람들의 목숨을 요구할 때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아끼고 내주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려워도 관계가 틀어지는 것은 한 순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다윗이 보여준 관용과 관계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우리의 관계 속에 나타나야 할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싫으면 주님도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고집이 아니라 관용과 회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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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9:9-15  찬송가: 10장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압살롬의 편에서 다윗을 대적하였던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이 모여 서로 변론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변론하다는 단어를 보면 ‘다투다, 재판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압살롬이 죽은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공식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한 자리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변론하는 내용을 보면 먼저 다윗 왕이 자신들을 구원했던 일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을 피하여 그 땅에서 나갔는데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는 대관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이 되었음을 공식적인 인정하는 행위가 기름을 붓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렇게 압살롬을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을 부었는데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제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고 와야 하는지에 대하여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10절 후반절을 보면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변론 끝에 내린 공식적인 결론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정을 내릴 때 유다 지파는 빠져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다시 모셔 오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자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유다로 보냅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이 다윗을 왕으로 모셔 오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면서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왕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와 내 골육이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려 하느냐’라는 말을 전하게 합니다.

 

다윗을 다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는 중대한 일었는데 유다 지파가 빠졌던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할 때 헤브론을 기점으로 시작했던 것을 보면 압살롬의 반역에 제일 먼저 동조하고 가담을 했던 지파가 유다 지파였기 때문에 반역의 주동자였던 유다 지파를 제외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이 될 때를 보면 유다 지파만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이스라엘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고 서로 대적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7년 반 동안 있었는데 아마 다윗이 유다의 왕으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던 기간 동안 지역적인 감정으로 골이 생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관계가 자연적으로 나누어졌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유다 지파가 빠져 버린다면 또 다른 지역적인 갈등과 분열이 생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유다 지파가 빠진 상태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면 유다 지파와 다윗의 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으며 다윗에게 등을 돌릴 수 있는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유다 지파 내에 있었기 때문에 유다 지파의 동조가 없으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유다로 급하게 보내 유다도 다윗을 왕으로 모셔 오는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아마사에게 말을 전하게 하는데 13절을 보면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아마사는 압살롬이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장관으로 삼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다윗의 조카이면서 요압과는 사촌 지간으로 다윗의 골육인 유다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군대가 압살롬의 군대와 전쟁을 할 때 압살롬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장관이 바로 아마사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마사에게 요압의 뒤를 이어서 다윗의 지휘관이 되게 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면서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보았던 것처럼 요압이 자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떠날 것이라는 맹세를 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기 때문에 다윗이 요압의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아마사를 생각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마사가 요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유다 지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거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반역했던 유다 지파를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아마사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마사에게 지휘관의 자리를 약속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14절을 보면 ‘모든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 같이 기울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어가 ‘그’로 되어 있는데 다윗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내린 판단과 결정으로 유다 사람들이 마음이 다윗에게 돌아오게 된 이유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이 다윗에게 돌아온 유다 사람들은 전갈을 보내 ‘당신께서는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돌아오소서’라고 다윗을 다시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동조할 것을 약속하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마하나임에 있던 다윗은 부하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요단 강 앞에 이르렀을 때 유다 족속이 다윗을 맞아 요단을 건너가게 하기 위해서 길갈로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20장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사울과 같은 지파인 세바를 따랐다’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 족속이 주도적으로 다윗을 맞이한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만이 있었거나 압살롬 반역의 주동자이고 유다 지파인 아마사를 지휘관으로 삼은 것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의 결정을 보면 별로 잘못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을 다 품으려는 다윗의 아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13절에서 ‘다윗이 아마사에게 요압을 이어서 지휘관이 되게 하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란다’고 말씀하는 부분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수단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이 더 우선이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결정이 하나님을 이용의 수단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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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9:1-8  찬송가: 337장

 

전령을 먼저 보냈던 요압의 군대가 성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승리하고 돌아온 군대를 다윗 왕이 맞아 주어야 했는데 안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며 왕이 나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다윗 왕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는데 왕이 밖으로 나와 환영해 주지 않으면서 오히려 적으로 싸웠던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고 있으니까 그 날의 승리가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왕이 슬퍼하다는 단어와 백성에게 슬픔이 되었다는 슬픔이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다윗이 슬퍼하였다는 단어는 ‘괴로워 하다, 고통을 주다, 미안하다, 슬퍼하다’는 의미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가질 수 있는 슬픔의 감정들을 모두 담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슬퍼하였다는 단어는 ‘애도하다는 의미와 비탄에 빠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느꼈던 슬픔은 물론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해 슬퍼하는 다윗을 애도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다윗을 위해 싸운 자신들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을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다윗에 대한 서운함이 함께 뒤섞인 감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나의 슬픔에만 사로잡혀 있다 보면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다윗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싸웠던 군사들에게는 상당히 민망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를 하고 돌아온 군사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승리를 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 아니라 오히려 패잔병이 된 죄인처럼 부끄러워 가만히 성읍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부르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부끄럽고 수치스러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다윗의 부르짖음은 압살롬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과 함께 자신의 죄로 인해 발생한 결과 때문에 자책감이 동반된 슬픔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말을 합니다.

‘왕이 보이는 행동은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과 비빈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부하들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지휘관들과 부하들을 멸시하는 행동을 나타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슬픔은 마치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여기다는 말에는 ‘기뻐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가 다 죽고 압살롬이 살았으면 오히려 왕이 기뻐하였을 것이라는 빈정이 상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을 보면 울고 있는 다윗을 향하여 요압이 강한 명령조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일어나세요, 나가세요, 왕의 부하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말을 하세요’라고 모든 동사들을 명령어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 것이라 그리하며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요압이 여호와의 이름을 두고 맹세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다윗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약 자신의 말에 다윗이 따르지 않는다면 왕과 함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남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와 맹세가 섞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 대해서 다윗이 자신의 말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반역을 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요압의 말은 실제로 반역을 하겠다는 의미라기 보다 자기 자식에 대해서 슬퍼하면서 자기 백성은 돌보지 않는다면 왕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입장에서는 만약 요압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강력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하 20장을 보면 세바가 반역을 했을 때 다윗이 아마사를 군대를 소집하는 장으로 임명을 하는데 요압의 힘을 분산시키고 견제하려는 행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 요압이 아마사를 칼로 죽이게 됩니다.

 

다윗의 슬픔은 아버지로서는 충분이 이해할 수 있지만 왕으로서는 자신을 위해서 싸웠던 백성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신앙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죄는 우리의 신앙의 균형을 깨뜨려 결국 무너지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죄로 인하여 분별력이 흐려지고 신앙의 균형이 무너지니까 아들을 향한 슬픔도 동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 받는 왕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요압의 말을 들은 다윗은 일어나 성문에 앉았습니다.

지금 다윗이 있는 성읍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요단 동편에 거주하던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경계에 있던 마하나님 성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차지했던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군사들을 소집하여 요단을 건너서 전쟁을 하였던 것입니다.

 

마하나님은 ‘하나님의 군대’라는 의미가 있는데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난 후 그곳의 이름을 마하나님으로 불렀던 장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 되었던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이 마하나님의 성문에 앉았다는 소식이 퍼지자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한 것처럼 성읍으로 들어갔던 백성들은 왕이 앉아 있는 성문으로 나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축하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를 뺀 이스라엘 지파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사울의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을 왕으로 삼았던 지파들이었으며 압살롬의 편에서 다윗을 반역하여 대적하였던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20장에서는 세바가 반역할 때 이스라엘이 함께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결국 분열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다윗이 죄로 말미암아 신앙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그의 가정이 그리고 그의 나라가 균열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죄로 인해 균열이 가는 곳이 있는지 살펴보고 온전히 회복되는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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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8:24-33  찬송가: 549장

 

다윗의 군대가 승리한 것과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구스 사람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달려 올 때에 다윗은 두 문 사이에 앉아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번 전쟁에 참여하려고 하였을 때 백성들은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압살롬의 군대는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않고 다윗 왕만 죽이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하면서 다윗은 성에 남아서 전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두 문 사이는 파수꾼의 성 문에서 가까운 위치로 다윗이 전쟁이 어떻게 되었나 소식을 빨리 듣기 위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소식을 기다리는 다윗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요압의 군대가 이기면 압살롬이 죽을 수 있고 압살롬의 군대가 이기면 다윗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정이 있어서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압살롬이 살아 있으면 또 다시 반역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인 후 전쟁의 결과를 전하게 하는데 사독의 아들이 아히마아스가 자신이 다윗에게 소식을 전하겠다고 하자 요압은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 너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은 다윗에게는 결코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아히마아스가 한사코 달려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요압이 허락을 하여서 두 사람의 전령이 전쟁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러 오게 됩니다.

 

성 문 위층에서 파수꾼이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 것을 보고하자 다윗은 만일 혼자이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좋은 소식을 기대합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하였을 경우에는 후퇴하는 병사들이 많이 있을 것이지만 혼자서 오는 경우는 전쟁의 승리를 전하는 전령일 경우가 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전령이 혼자 달려온다고 하니까 다윗은 ‘그도 소식을 가져 온다’고 말을 하는데 다윗이 기대하는 소식은 요압의 군대가 승리를 하고 압살롬도 죽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7절을 보면 파수꾼이 앞에서 달려오는 사람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다’고 보고를 하자 다윗은 ‘그가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기대를 하게 됩니다.

다윗은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소식을 가지고 오니 그가 좋은 소식을 기대합니다.

압살롬이 살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온 아히마아스는 전쟁의 소식을 전하는데 28절을 보면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을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를 넘겨 주셨다’고 보고를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보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리보다는 압살롬이 잘 있는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29절을 보면 다윗은 전쟁에서 승리한 군사들을 격려하는 말도 없이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라고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히마아스는 요압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의도를 깨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다’고 대답하면서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다윗의 관심은 두 번째로 온 전령의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승리를 전했던 아히마아스를 물러나 서 있게 하면서 구스 사람에게 소식을 듣습니다.

 

구스 사람은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다’고 보고를 하자 또 다시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고 압살롬에 대한 소식만 궁금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구스 사람은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을 합니다.

전령이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기를 원한다는 말은 압살롬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전령의 말을 들자 다윗은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울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다윗에게는 전혀 기쁜 일이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승리를 전하는 전령들에게 승리에 대한 어떤 축하의 말도 없이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파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다면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울면서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절규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일이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것에 대한 참회의 절규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윗의 범죄로 인하여 밧세바를 통하여 낳았던 아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압살롬의 누이를 강간한 암논이 압살롬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도 죄에 대하여 간과하고 방임했던 아버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압살롬의 죽음도 아버지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심판의 말씀을 하셨는데 결국 다윗의 죄로 인하여 자녀들이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절규가 자식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다윗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군사들의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이 없는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죄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우리의 영적 분별력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도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더 그럴 수 있음을 경계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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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7:1-14 찬송가: 425장

 

오늘 본문을 보면 아히도벨이 다윗을 죽이려는 계략을 압살롬에게 말하는데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여 오늘밤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 죽이고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사무엘하 16:14절을 보면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서둘러 도망을 간 다윗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아히도벨은 예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피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를 노려 기습을 한 뒤 무섭게 하면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무서워서 다 도망을 갈 것이고 그러면 내가 다윗만 죽이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면 살아난 사람들은 압살롬이 자기 백성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 군주로 인정을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모든 백성들이 압살롬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반드시 죽이겠다고 말을 하는데 그 이유가 만약 아히도벨이 밧세바의 할아버지라고 하면 손녀와 사위에 대한 복수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 솔로몬도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손녀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다윗이 살아 있으면 압살롬의 왕권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히도벨 자신도 무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히도벨은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려있다’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백성들이 왕께 돌아오게 하는 방법은 다윗을 죽이는 것 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해야 ‘모든 백성이 평안할 수 있다’고 말을 하면서 자신이 다윗을 죽이는 일이 백성들의 평안을 위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아히도벨의 말을 들은 압살롬과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제 말씀에서 아히도벨의 계략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정말 아히도벨이 말한 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그가 말한대로 일이 이루어졌을 것 같습니다.

 

압살롬과 장로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을 보면 상황판단을 잘하고 일을 예측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이라는 이름의 뜻을 보면 ‘어리석음의 형제’란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이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아히도벨이 똑똑하고 앞을 판단하는 능력이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압살롬과 거기에 있던 모든 장로들이 아히도벨의 말을 옳게 여겨 그의 계략대로 진행할 것 같았는데 4절을 보면 갑자기 압살롬이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말했을 때는 압살롬이 후새에게 어떤 말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아히도벨의 말을 좋게 여겼음에도 후새를 부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후새가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했던 말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후새는 압살롬이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택한 것이며 반역이 아니라 정당하게 왕권을 위임 받은 것이라고 인정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후새는 다윗 때 아히도벨과 함께 모사의 쌍두마차였는데 후새가 좀 더 다윗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후새가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고 판단한 압살롬은 후새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새의 말도 듣기 위해서 그를 부르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후새가 오자 압살롬은 아히도벨이 말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그 말 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고 명령하면서 말을 합니다.

 

그러자 후새는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않다’고 대답을 합니다.

후새는 아히도벨의 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히도벨의 계략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후새가 생각하는 계략을 말하기 전에 다윗이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이야기 합니다.

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의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어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윗을 치러 갔다가는 오히려 패하게 될 것이고 만약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압살롬을 따르는 군대가 다윗에게 패하였다는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인 압살롬이라 할지라도 낙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사들을 여러 번 보냈지만 다윗이 죽지 않았고 오히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올라서게 되었던 것을 압살롬과 장로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새의 말은 압살롬과 장로들의 마음에 다윗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후새는 자신의 계략을 말하는데 ‘온 이스라엘을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압살롬에게로 모은 다음에 압살롬이 친히 전장에 나가서 다윗을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할 때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전면전을 펼쳐 다윗을 공격하여 다윗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새는 압살롬의 과시욕을 자극하면서 다윗보다 더 강력한 용사처럼 온 이스라엘 군대를 소집하여 다윗의 세력을 한번에 모두 진멸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윗이 도망 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14절을 보면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고 압살롬과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명령하다는 단어를 보면 ‘구성하다, 지정하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비록 다윗이 죄로 인한 책임으로 인하여 고난과 고통을 길을 가게 되었지만 죄를 회개하고 믿음 안에 들어온 자를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37편을 보면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걸음이 때로는 다윗과 같이 고통과 고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은혜의 손길을 경험하는 축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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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6:15-23  찬송가: 447장

 

헤브론에 있던 압살롬은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들과 예루살렘으로 들어왔고 압살롬의 반역에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아히도벨도 압살롬과 함께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에 들어왔는데 다윗의 친구인 아렉 사람 후새가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라고 외치면서 압살롬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후새가 다윗의 친구이며 그의 모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압살롬은 후새의 뜻밖의 행동에 이상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고 의심 섞인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후새가 대답을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새의 말은 압살롬이 반역으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장자였던 암논이 죽고 둘째였던 길르압도 죽은 상태였기 때문에 셋째인 압살롬이 다윗의 장자가 되어 왕위를 잇는 후계자로서 왕이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택한 자가 압살롬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처음에는 후새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고 자신을 환대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왕의 후계자로 인정해 주고 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말을 하면서 다윗 왕을 섬긴 것처럼 그의 아들인 압살롬을 섬기겠다는 말을 하니까 의심이 신뢰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고 말을 하면서 아히도벨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로 인하여 예루살렘까지 들어와 왕위를 찬탈할 수 있었으니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였을 것입니다.

 

압살롬의 말에 아히도벨은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 질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아히도벨의 말은 후세의 말과는 반대로 왕의 후계자가 아닌 왕권을 찬탈한 자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연을 끊어야 당신의 나라가 더욱 힘이 강해질 것이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후궁과 동침을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죄로서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동침함으로 장자의 권리를 빼앗기게 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레위기에서 계모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하는 율법을 거스리는 죄였습니다.

 

아히도벨이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이런 계략을 말하는 이유는 당시 왕권을 찬탈한 자들이 자신이 왕권을 확실히 차지하였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로 이전 왕의 첩들을 취하였는데 압살롬이 다윗의 왕위를 완전히 빼앗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다윗과 압살롬의 부자의 연을 확실히 끊어 버리는 행위를 통하여 혹시라도 나중에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가 회복된다면 압살롬을 도운 자신이 위험해 처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아히도벨의 말을 들은 압살롬은 그의 말 대로 옥상에 장막을 치고 온 이스라엘의 눈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을 하게 됩니다.

이 일은 다윗에게 크나 큰 수치와 치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사무엘하 12장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칼로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내가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게 하실 것이라’는 심판의 말씀이 성취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23절을 보면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말한 계략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주신 말씀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자칫 이 말씀을 아히도벨의 계략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히도벨의 계략을 다윗과 압살롬이 어떻게 받아 들이고 있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아히도벨의 계략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말씀하는 것으로 아히도벨에게서 나오는 계략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지혜로웠다는 의미입니다.

 

역대상 27장을 보면 아히도벨이 다윗의 모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의 모사가 되어 다윗에게 말하는 계략들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마치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것과 같았다는 말씀입니다.

 

다윗 뿐만 아니라 그가 압살롬의 모사가 되어 주는 계략들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15장을 보면 압살롬이 아히도벨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였을 때 압살롬의 반역하는 일이 커졌고 압살롬에게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져 결국 반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로운 아히도벨이었는데 선한 양심은 소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왜 다윗의 모사였다가 반역을 꾀하는 압살롬의 모사가 되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히도벨의 아들이 엘리암인데 밧세바의 아버지 이름이 엘리암이었다는 말씀 때문에 엘리암이 같은 사람일 경우 우리아는 아히도벨의 손녀 사위가 되기 때문에 아히도벨이 손녀 사위를 죽인 다윗을 배신을 한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엘리암이 동명이인이라면 아히도벨은 아마 정치적인 야욕 때문에 다윗을 배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 27장에서 아히도벨이 다윗의 모사가 되었다고 하면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아렉 사람 후새는 왕의 벗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보다 후새가 다윗과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였던 것처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히도벨과 후새는 다윗의 모사였지만 후새가 다윗에게 더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은 후새가 있는 한 자신이 일인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압살롬이 자신을 초청하니까 과감히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에게 가서 자신의 꿈과 야망을 펼치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커지고 다윗이 도망을 가고 예루살렘까지 점령하게 되니까 자신의 야망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일장춘몽으로 끝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이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자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는 먼 어리석은 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과 달란트가 아무리 크고 좋아도 하나님의 뜻에 상반된 일에 사용이 된다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린다고 하더라도 어리석은 자가 되어 시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며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일이 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과 달란트들이 나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 우리는 아히도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는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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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6:1-14  찬송가: 370장

 

오늘 본문 1절의 마루턱은 꼭대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감람산 꼭대기를 의미합니다.

이제 감람산을 지나가면 예루살렘을 벗어나게 되는데 그곳을 지날 때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을 지운 나귀 두 마리에 떡 이백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이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고 묻자 시바는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기 위함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사무엘하 19장을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을 간다는 소식을 들렸을 때 므비보셋은 두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것을 타고 왕과 함께 가려고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시바가 가지고 온 음식들은 다윗을 따라가려고 했던 므비보셋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주려고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시바가 므비보셋을 속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였다는 단어는 어떤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배반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따라가려고 했던 므비보셋이 다윗을 따라가지 못하게 만든 것이 시바였다는 것입니다.

아마 두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이 다윗을 따라가는 것은 오히려 다윗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니 가지 말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을 생각하는 므비보셋은 자기 때문에 다윗이 피해를 당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시바의 말대로 다윗을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시바는 아마도 므비보셋이 준비했던 음식들도 자신이 잘 전달해 주겠다고 안심을 시켰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시바는 다윗을 위해 자신이 모든 것을 준비한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시바가 대답을 하는데 ‘므비보셋은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릴 것이라’고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시바는 므비보셋이 오기 전까지 자신이 사울의 집에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울에게 속한 것들을 자기 것처럼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이 오고 난 이후 상황이 변해 버린 것입니다.

두 다리를 저는 므미보셋의 종으로 살아야 했고 사울의 재산도 이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다윗의 사랑을 받을 때는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다윗이 도망을 가는 상황이 되자 자신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을 하고 아들의 반역 때문에 슬픔으로 도망을 가는 다윗에게 므비보셋도 반역을 하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고한 것입니다.

 

그러자 4절을 보면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을 해버립니다.

 

평상시 같으면 말도 안된다고 믿지 않았거나 정말인지 사실을 확인하려고 하였을 텐데 아들 때문에 도망을 가고 슬프고 힘든 상황에 처하니까 분별력이 사라지고 사실 확인도 없이 그저 시바의 말에 따라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에 시바는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대답을 합니다.

자기 의도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시바가 참 나쁜 사람이고 사악한 것 같은데 그의 말에 현혹되어 이런 결정을 내리는 다윗이 답답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 분별력을 잃어 버릴 때 이와 같이 악한 자에게 미혹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나 힘든 상황만 바라보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고 미혹하는 말에 넘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물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조금만 더 분별력을 가지고 상황을 인지했더라면 더 좋은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분별하고 판단하며 결정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면 다윗이 감람산을 넘어 요단으로 내려가는데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라 하는 사람이 다윗에게 저주를 하고 다윗과 모든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따라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므이가 저주하는 말을 보면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모든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다’는 말이었습니다.

 

시므이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 때문에 사울의 집이 무너지고 그로 인하여 자신에게도 피해가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강성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 도망가는 상황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신 것이라고 말하면서 미움과 분노로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는 일어나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분노와 감정을 드러내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시므이의 말은 다윗 뿐만 아니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견디기 힘든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조카이며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말을 합니다.

 

그랬을 때 다윗은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시므이를 시켜서 다윗을 저주하게 하셨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저주하라고 하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이 저질렀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당하는 일들에 대해서 12절을 보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기를 원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힘든 상황일 때 이와 같은 고백을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눈 앞에 힘든 것들이 빨리 없어지면 좋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감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뜻에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므이는 포기하지 않고 따라오면서 저주를 하고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면 먼지를 날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좀 하면 좋을 텐데 우리를 미혹하고 공격하는 대적들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우리를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 말에 미혹되어 분별력이 사라질 때 우리의 판단과 결정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감정적인 대응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대적 앞에서 우리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에 우리를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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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5:24-37  찬송가: 214장

 

헤브론으로 내려간 압살롬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에게 정탐을 보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퍼트리게 합니다.

처음에는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헤브론으로 내려갔는데 이들은 압살롬이 꾸민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합류하면서 반역하는 일이 커져 갔고 압살롬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빨리 도망가자고 말을 한 뒤 후궁 열 명에게는 왕궁을 지키게 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랬을 때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다윗을 따라서 나왔고 가드 사람 잇대가 육백 명을 데리고 다윗을 호위하였습니다.

가드는 블레셋에 속한 도시로 골리앗도 가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잇대는 육백 명을 거느린 블레셋의 장수였는데 다윗을 따라 이스라엘로 망명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제 말씀에 이 잇대가 다윗을 호위하여 기드론 시내를 건넜다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군대 장관은 요압이었는데 다윗이 도망갈 때 요압의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군대를 동원하여 도망갈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다윗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을 빠져 나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사독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레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따라 왔고 제사장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다윗과 함께 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메고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25절을 보면 다윗이 사독에게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고 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실 것이라’고 말을 하고 26절에서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라고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보면 블레셋과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 오라고 말을 하였다고 승리할 것 같으니까 자신의 말을 취소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가 언약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보다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이용하여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레위인들이 언약궤를 메고 온 이유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다윗과 함께 하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언약궤가 함께 하면 압살롬의 반역으로부터 다윗이 승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언약궤를 도로 예루살렘으로 메고 가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기의 승리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도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그 뜻에도 순종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 다윗의 상황을 보면 아들의 반역으로 인해 급히 예루살렘을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던 이유는 그곳에 회막이 있었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만약 언약궤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내편이라는 것을 보여 주면 시각적인 효과를 줄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 주는 수단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시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27절을 보면 다윗이 제사장 사독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성읍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너희에게서 내게 알리는 소식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아야 대처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사독에게 예루살렘의 상황을 알려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다윗의 말대로 사독과 아비아달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메고 돌아갔으며 예루살렘에 머무르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을 가는 다윗의 모습에 대하여 30절을 보면 ‘다윗이 감란 산 길로 올라갈 때에 그의 머리를 그가 가리고 맨발로 울며 가고 그와 함께 가는 모든 백성들도 각가 자기의 머리를 가리고 울며 올라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반역이 얼마나 슬프고 수치스럽고 고통이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이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아히도벨로 인하여 다윗을 떠나 압살롬에게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가 모략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기도는 간략하지만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덮어쓰고 다윗을 맞으러 오는데 후새가 다윗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며 다윗과 동행하기 위해서 후새가 나왔는데 다윗은 후새에게 ‘네가 만일 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성읍으로 돌아가서 ‘내가 왕의 종입니다. 내가 왕의 아버지의 종이었지만 이제 내가 왕의 종입니다 라고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왕궁에 있으니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그들에게 알리면 그의 두 아들이 내게 소식을 알려 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후새가 다윗의 말을 알아듣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고 헤브론에 있던 압살롬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후새를 다윗의 친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친구를 ‘동역자’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도망을 가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와 함께 하는 동역자들과 합력함으로 다시금 돌아올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에 기대하지 않은 일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할 때 슬픔과 절망이 찾아올 수 있지만 오늘 본문의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며, 기도하고, 주님의 몸된 동역자들과 합력함으로 다시 회복해 주시는 은혜가 넘치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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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4:12-24  찬송가: 397장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나자 여인은 사실대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다윗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자신이 한 말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요압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죽이면 자신이 살 수 있었고 두 번이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죽일 수 없다고 실행하지 않았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데려올 계획을 짤 때 다윗의 입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도록 유도하고 그렇게만 되면 다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나자 여인은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여쭙게 해달라’고 하면서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13절을 보면 여인은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이 같은 생각을 하셨느냐’고 하면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과 다른 생각으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말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죄 있는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합니다.

여인의 입으로 압살롬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내쫓긴 자가 압살롬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윗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는 것은 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과 다르기 때문에 죄를 범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은 다윗이 범하였던 죄와 압살롬의 죄를 연관시키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압살롬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던 일을 다시 돌이킬 수 없지 않느냐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일도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 같이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신다’고 말을 하는데 다윗이 죄를 범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사 다윗의 생명을 빼앗지 않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신 것처럼 내쫓긴 자, 압살롬도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종은 다윗의 여종에 대한 판결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리셨던 은혜의 판결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동생을 죽인 큰 아들을 죽여야 한다고 나를 두렵게 하였지만 내가 왕께 청하면 왕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내 아들을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실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쐐기를 박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여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여인의 큰 아들을 죽이지 않게 하겠다는 다윗의 판결이 하나님의 사자와 같이 선악을 분간하는 지혜로운 말이라고 추켜 세우면서 왕의 판결이 나의 위로가 되었으니 다윗이 맹세하며 판결한 것처럼 압살롬을 살려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을 듣던 다윗은 요압이 여인을 시켜서 한 것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내가 네게 묻는 것을 숨기지 말라’고 하면서 ‘이 모든 일에 요압이 함께 하였느냐’는 질문을 합니다.

 

여인의 말에 다윗이 지었던 죄와 상황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개입되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우리아를 교살하라고 시킨 것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요압 밖에 없기 때문에 다윗은 여인에게 말을 준 사람이 요압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질문에 여인은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다’고 말을 하는데 다윗이 짐작한 것이 틀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20절을 보면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원문을 보면 ‘그 얼굴을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이 말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이 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이런 일까지 모두 아시는 다윗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여인이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윗을 하나님의 사자와 같이 지혜롭다고 높여 주면서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21절을 보면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여인의 큰 아들을 살려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압살롬을 데려오라고 허락한 것과 같으니 압살롬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절하고 복을 빌고 은혜를 입었다고 말을 한 뒤에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옵니다.

 

그런데 24절을 보면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압살롬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돌아오라고 하였지만 장자인 암논을 죽인 압살롬의 죄에 대해서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지 않음으로 죄를 묵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해석을 합니다.

 

다윗이 왜 압살롬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하여 압살롬이 다윗에 대한 반역을 계획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다윗이 보인 행동은 공의와 긍휼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보이지 못한 판결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죄를 범한 이후의 다윗을 보면 죄를 범하기 이전의 삶보다 영적인 칼이 많이 무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이었음에도 죄의 열매로 인하여 그와 그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보면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면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의 죄의 모양을 버리고 거룩함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우리의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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