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14:1-11 찬송가: 9장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스루아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면서 요압이 드고아에 사는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서 압살롬을 데려올 계획을 진행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3장을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맏아들이 암논이었고 둘째는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통해서 낳은 길르압이었으며 셋째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인 압살롬이었습니다.
다윗의 둘째였던 길르압의 이름이 사무엘하 3장에서 딱 한 번 등장을 하고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아마도 그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암논이 죽은 이후 다윗의 장남이 압살롬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정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장남이 되는 압살롬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형을 죽인 살인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눈치 챈 요압이 압살롬을 데리고 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리고 오게 합니다.
드고아는 베들레헴 남쪽에 위치한 유다 지파에 속한 땅으로 유다 지파이고 베들레헴이 고향인 다윗의 마음을 좀 더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에게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꾸미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다윗에게 가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알려줍니다.
다윗의 조카였고 군대장관이었으며 항상 다윗과 함께 했던 요압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요압이 말한 대로 변장을 하고 다윗에게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왕이여 도우소서’라고 말을 합니다.
여인은 자신은 남편이 죽은 과부이며 아들 둘이 있는데 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였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35장을 보면 살인의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사람을 죽였을 경우 도피성으로 돌려보내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악의를 가지거나 미워하는 까닭에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살인한 자로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서로 형제들끼리 싸우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죽였다고 말을 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미움으로 인한 살인이라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7절을 보면 ‘온 족속이 일어나서 여인을 핍박하여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동생을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가 될 것까지 끊어버리겠다’고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데려오기를 멈추고 압살롬이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가 율법으로 하면 압살롬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만약 동생을 죽인 형까지 죽게 된다면 자신의 씨가 세상에 없어지고 기업을 무를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을 무르는 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지키는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과부인데 남아 있는 아들마저 죽음을 당하여 기업을 무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살아 있어도 전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여인은 다윗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압이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하게 한 이유는 다윗이 공의와 긍휼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압살롬을 데려올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다윗은 여인에게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공의보다는 긍휼을 선택합니다.
그러자 9절을 보면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혹시라도 압살롬을 데리고 왔을 때 율법대로 압살롬을 죽여야 한다는 공의를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압살롬의 죄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인 다윗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압살롬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10절을 보면 다윗은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는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라’고 다시금 확답을 해줍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여인이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해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다’고 간청을 합니다.
다윗이 왕의 권한으로 확답을 하였지만 그것으로도 안심할 수 없으니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버립니다.
요압이 공의와 긍휼 사이에서 압살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다윗에게 압살롬을 데려올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 주었지만 공의를 무시한 채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공의 없는 긍휼은 율법과 말씀이 필요 없는 무법천지가 되고 긍휼 없는 공의는 정죄와 판단이 난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결정으로 인하여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였더라면 좀 더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공의와 긍휼과 은혜 사이에서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결정을 하거나, 다수가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우선이 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행동하고 기도하기보다 먼저 기도하고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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