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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4:1-11  찬송가: 9장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스루아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면서 요압이 드고아에 사는 지혜로운 여인을 통해서 압살롬을 데려올 계획을 진행하게 됩니다.

 

사무엘하 3장을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맏아들이 암논이었고 둘째는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통해서 낳은 길르압이었으며 셋째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인 압살롬이었습니다.

 

다윗의 둘째였던 길르압의 이름이 사무엘하 3장에서 딱 한 번 등장을 하고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을 볼 때 아마도 그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암논이 죽은 이후 다윗의 장남이 압살롬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정하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장남이 되는 압살롬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형을 죽인 살인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눈치 챈 요압이 압살롬을 데리고 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리고 오게 합니다.

 

드고아는 베들레헴 남쪽에 위치한 유다 지파에 속한 땅으로 유다 지파이고 베들레헴이 고향인 다윗의 마음을 좀 더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에게 상주가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꾸미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다윗에게 가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알려줍니다.

다윗의 조카였고 군대장관이었으며 항상 다윗과 함께 했던 요압이었기 때문에 다윗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드고아의 여인은 요압이 말한 대로 변장을 하고 다윗에게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왕이여 도우소서’라고 말을 합니다.

 

여인은 자신은 남편이 죽은 과부이며 아들 둘이 있는데 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말리는 사람이 없어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였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35장을 보면 살인의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사람을 죽였을 경우 도피성으로 돌려보내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악의를 가지거나 미워하는 까닭에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는 살인한 자로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서로 형제들끼리 싸우다가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죽였다고 말을 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미움으로 인한 살인이라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7절을 보면 ‘온 족속이 일어나서 여인을 핍박하여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동생을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가 될 것까지 끊어버리겠다’고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데려오기를 멈추고 압살롬이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가 율법으로 하면 압살롬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만약 동생을 죽인 형까지 죽게 된다면 자신의 씨가 세상에 없어지고 기업을 무를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을 무르는 일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지키는 중요한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과부인데 남아 있는 아들마저 죽음을 당하여 기업을 무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살아 있어도 전혀 소망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여인은 다윗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압이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하게 한 이유는 다윗이 공의와 긍휼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서 압살롬을 데려올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다윗은 여인에게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공의보다는 긍휼을 선택합니다.

 

그러자 9절을 보면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혹시라도 압살롬을 데리고 왔을 때 율법대로 압살롬을 죽여야 한다는 공의를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였을 경우 압살롬의 죄에 대해서 그의 아버지인 다윗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켜 압살롬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10절을 보면 다윗은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는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라’고 다시금 확답을 해줍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여인이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해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다’고 간청을 합니다.

 

다윗이 왕의 권한으로 확답을 하였지만 그것으로도 안심할 수 없으니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에 다윗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해버립니다.

 

요압이 공의와 긍휼 사이에서 압살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다윗에게 압살롬을 데려올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해 주었지만 공의를 무시한 채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 것이 잘한 일이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공의 없는 긍휼은 율법과 말씀이 필요 없는 무법천지가 되고 긍휼 없는 공의는 정죄와 판단이 난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다윗의 결정으로 인하여 또 다른 비극을 초래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였더라면 좀 더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도 공의와 긍휼과 은혜 사이에서 어떤 판단을 해야 할 때 내 마음이 끌리는 대로 결정을 하거나, 다수가 원하는 대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가 우선이 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행동하고 기도하기보다 먼저 기도하고 행동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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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3:30-39  찬송가: 292장

 

다윗의 아들들이 도망을 가는 길에 있을 때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소식이 다윗에게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일어나 자기의 옷을 찢고 땅에 드러누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옷을 찢었다는 것은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이었는데 다윗의 이런 행동은 19절에서 다말이 자신의 채색옷을 찢었던 모습과 overlap 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암논이 행한 죄에 대해서 화를 내기는 했지만 암논에게 어떤 징계를 하거나 다말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였다는 말씀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냥 넘어가고 잊어 버리려는 방관자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가 이제 다윗이 자기 옷을 찢으며 슬퍼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일어난 일에 대한 결과를 뒤돌릴 수 없고 아들을 잃었다는 슬픔이 크겠지만 만약 다윗이 다말의 슬픔을 위로해 주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일을 판단하고 진행하였더라면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옷을 찢고 쓰러져 슬퍼하자 신하들도 자기의 옷을 찢으며 쓰러진 다윗을 일으켜 세워 주었는데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인 요나답이 다윗을 위로하며 말을 합니다.

 

32절을 보면 요나답이 다윗에게 ‘내 주여 젊은 왕자들이 다 죽임을 당한 줄로 생각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으리이다 그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압살롬이 결심한 것이니이다 그러하온즉 내 주 왕이여 왕자들이 다 죽은 줄로 생각하여 상심하지 마옵소서 오직 암논만 죽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나답이 압살롬과 암논의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하였을 텐데 이런 사실은 요나답만 알고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제 말씀을 보면 다윗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윗이 이 일을 사건의 당사자에게서 보고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은 다말에게 이 일에 대해서 잠잠하라고 말을 하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고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고 죄를 행했던 주체인 암논이 자신의 잘못을 다윗에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신하 중 한 명에게 보고를 받았다는 의미가 되고 그 사실을 다른 신하들도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은 다윗 왕이 노를 발하였지만 암논에 대해서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다른 신하들도 감히 말을 하지 않았던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나답의 위로가 있고 난 다음 34절을 보면 요나답이 말한 대로 파수꾼으로부터 다른 왕자들이 뒷산 언덕길을 통해서 온다는 보고를 받게 됩니다.

‘뒷산’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당시 예루살렘의 동쪽을 앞쪽으로 서쪽을 뒤쪽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뒷산’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을 쳤던 왕자들이 혹시 압살롬의 종들이 쫓아올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정상적인 방향이 아닌 길을 돌아서 왔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먼저 들렸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암논을 죽인 압살롬이 도망을 갈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생겼을 것입니다.

 

36절을 보면 ‘왕자들이 돌아와서 소리를 높여 통곡을 하니 왕과 그의 모든 신하들도 심히 통곡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자들의 통곡보다 다윗과 신하들의 통곡이 더 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왕이 그러니까 따라서 그랬겠지만 다윗의 통곡이 심히 더 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자식을 잃은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자식의 살인과 죽음을 막지 못한 자책감이 더하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압살롬이 그슬 왕 암미홀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을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술은 요단 동편에 있던 나라로 다윗이 달매의 딸이었던 마아가와 정략 결혼을 한 곳이었습니다.

압살롬이 외할아버지에게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술은 다윗이 정략 결혼을 통해서 동맹을 맺은 나라였기 때문에 압살롬을 강제적으로 데려올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37절을 보면 ‘다윗이 날마다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슬퍼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들이라는 단어가 ‘단수’로 되어 있어서 ‘죽은 암논’ 때문에 슬퍼하였다고도 해석을 하고 ‘아들을 죽이고 도망간 압살롬’ 때문에 슬퍼하였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다윗이 죽은 ‘암논으로 말미암아 슬퍼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압살롬에 대한 간절함은 3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시간이 흐른 뒤에 생기는 감정이었다면 자신의 장남이었고 아마도 후계자로 생각하였던 암논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 더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그술로 도망을 간지 삼 년이 지났을 때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원문에 대한 의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다윗이 압살롬을 끌어 내려는 마음을 그쳤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잡아와서 암논을 죽인 죄를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압살롬을 잡아오려는 마음이 그치고 오히려 암살롬에 대한 간절함이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일 말씀을 보면 ‘요압이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았다’고 말씀하면서 다윗이 압살롬을 생각하는 마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였다고 번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위로를 받았다’는 단어는 ‘안정을 되찾다’는 의미로 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죽은 암논에 대한 슬픔은 사라지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다윗의 집에 비극이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보면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게 네 눈 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동침할 것이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의 집에 재앙이 일어나는 이유가 물론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만약 다윗이 자녀들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민감하게 반응하였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혹시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빨리 돌아 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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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3:15-29  찬송가: 343장

 

다윗의 장남이었던 암논은 욕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이복 누이이며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을 강간을 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암논이 다말을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암논이 전에 다말을 사랑하였다고 말씀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암논이 다말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거나 그녀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해결할 대상으로 생각하여 육체적인 관계만을 원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성적인 욕구를 사랑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가 진짜 사랑을 의미하는 단어와 다르지 않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욕에 사로잡힐 때 사랑이 얼마나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강제로 다말을 강간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나자 전에는 사랑의 대상이었던 다말이 이제는 더 이상 욕망을 채울 필요가 없는 거추장스러운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암논은 다말에게 ‘일어나 가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웠으니 더 이상 필요없다고 다말을 내쫓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16절을 보면 ‘다말이 암논에게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내게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는 말을 합니다.

다말이 처녀였기 때문에 암논이 그를 범하였으면 출애굽기 2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정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 동침하였을 경우 결혼 지참금을 주고 아내로 삼아야’ 했습니다.

암논이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하며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듣지 않고 부리는 종에게 ‘이 계집을 내게서 이네 내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다말은 ‘재를 자기 머리에 덮어 쓰고, 입고 있던 채색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가서 크게 울부짖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당한 수치와 굴욕과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자 다말의 친오빠인 암살롬이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고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너를 그렇게 했느냐’는 의미입니다.

 

암논이 행한 것을 알자 압살롬은 ‘그는 네 오라버니니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암논이 문제를 삼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다윗의 장남으로 왕권을 이을 가능성이 제일 컸기 때문에 지금은 암논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기회를 보자는 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다말의 수치를 자신이 갚아 주겠다는 의미로 실제로 2년 후에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다윗 왕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노하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20장을 보면 ‘아버지의 딸의 하체를 범하면 그들이 민족 앞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죄를 범한 자가 그 죄를 담당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화만 내고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자신도 그와 같은 죄를 지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암논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다윗이 장남이었던 암논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논의 수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암몬에게 죄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지게 하여 이복 누이인 다말과 혼인을 하라고 하였으면 더 큰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다윗의 죄에 대한 무반응이 결국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압살롬은 이미 암논을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암논에게 잘잘못을 말하지 않고 암논을 죽일 기회를 엿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찾아왔는데 만 이년 후에 압살롬이 예루살렘에서 거리가 떨어진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압살롬이 양털을 깎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양털을 깎는 날은 축제와 같았기 압살롬이 그 날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잊어 버린 것처럼 보일 수 있었기 때문에 압살롬이 2년동안 참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23절에 먼저 다윗의 모든 아들들을 초청을 해서 특별한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24절을 보면 ‘압살롬이 다윗에게는 다윗과 신하들을 데리고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압살롬이 다윗도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 보다는 다윗이 국정을 비우고 먼 에브라임까지 신하들을 데리고 대동을 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압살롬은 자신의 초청이 그저 함께 즐기기 위한 초청이라고 다윗을 안심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갈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축복을 하자 압살롬은 대신 ‘내 형 암논이 우리와 함께 가게 해달라’고 청을 합니다.

다윗 대신 암논을 가게 해달라는 것은 당시 다윗의 장자인 암논이 왕의 후계자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압살롬에게 ‘그가 너와 함께 갈 것이 무엇이냐’라고 대답을 하는데 암논이 다말에게 했던 일이 꺼림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압살롬이 간청을 하니까 다윗은 ‘암몬과 왕의 모든 아들을 그와 함께 보내는 것’으로 결정을 합니다.

암몬만 보내면 불안하기 때문에 왕자들을 모두 보내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계략에는 이것까지 모두 계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종들에게 명령을 하는데 암논이 술에 취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내가 암논을 치라고 신호를 주면 암논을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담대히 용기를 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때 주시는 말씀과 같은데 압살롬은 자신의 원수를 갚기 위한 수단으로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강하고 담대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나타나야 하는데 엉뚱한 일에 강하고 담대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 없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명령대로 그의 종들이 암몬을 죽였고 다윗의 다른 아들들은 노새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이 모든 일들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였던 죄의 결과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지만 그 죄에 대한 열매들이 자녀들에게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한 확실한 회개와 책임이 없이 대충 넘어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으니까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욕망대로,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죄의 쓴 뿌리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작은 여우가 우리 마음의 밭을 갉아 먹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틈을 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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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1:14-27  찬송가: 259장

 

우리아가 자신의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신복들과 함께 병사 숙소에서 계속 잠을 자니까 다윗은 자신의 죄를 가릴 수 있었던 방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 임신한 밧세바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만천하에 공개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무죄한 우리아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죄에 눈이 멀게 되면 사람이 뵈는게 없어지고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지 다윗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암몬과 전쟁을 하고 있는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전달하게 합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다윗은 우리아에게 편지를 주면서 요압만 알아야 하는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우리아에게 편지의 내용을 보면 안된다는 말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우리아는 다윗에게 받은 편지를 그대로 요압에게 전달합니다.

 

편지를 전달 받은 요압은 암몬의 용사들이 지키고 있는 랍바 성 가까운 곳에 우리아를 배치합니다.

그래서 결국 암몬의 용사들이 나와서 요압의 군사들과 싸울 때 다윗의 신복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성 위에서 쏜 화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가리기 위한 다윗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헷 사람 우리아가 죽음을 맞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윗의 신복들까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요압은 사자를 보내 전쟁에서 있었던 일들을 다윗에게 보고하게 하는데 만약 ‘다윗이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적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여룹베셋이라고 불리웠던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여인이 성에서 던진 맷돌 윗짝으로 말미암아 죽지 아니하였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느냐’고 화를 내면서 책임을 추궁하면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다’고 보고를 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압이 보낸 사자가 다윗에게 보고를 하는 내용을 보면 헷 사람 우리아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암몬 사람들이 우리보다 우세하여 들로 나오자 우리가 저희를 쳐서 성문 어귀까지 미쳤다’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의 모습처럼 보일 수 있는데 이스라엘 군대가 성문 어귀까지 미쳤다는 말은 평상시 전투에서는 하지 않는 무모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문 어귀까지 갔다는 것은 성을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활을 쏠 수 있는 사정권 안에 들어갔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헷 사람 우리아와 그의 신복들이 암몬 군사들을 치기 위해서 성문 앞까지 갔다는 것은 다윗의 편지를 받고 우리아를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요압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편지를 보면 우리아를 싸움의 최전방에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요압은 암몬을 공격하는 최선봉에 우리아를 두고 암몬 사람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암몬의 성문 앞에 이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최선봉에 있던 우리아가 죽는 것을 확인하고 후퇴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인 상황 같으면 성에서 활을 쏴도 공격을 당하지 않을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을 텐데 다윗의 명령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신복들과 우리아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헷 사람 우리아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은 다윗이 어떤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군사들이 죽었다는 슬픔이 아니라 이제 자신의 죄를 완전하게 덮을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25절을 보면 ‘다윗이 사자에게 너는 요압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하게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다윗이 자비로움이 많은 인자한 왕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말에는 우리아에 대한 죄책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아의 죽음이 전쟁으로 인한 것이며 자신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싹이 나고 누룩처럼 번질 때 사람이 얼마나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죄가 들어가면 더 이상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죄에 사로잡힌 죄의 종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우리아의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밧세바가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이를 임신한 밧세바가 어떤 심정으로 남편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며 애곡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밧세바의 모습은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불쌍한 아내의 모습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27절을 보면 ‘우리아의 장례 절차가 모두 마친 후에 다윗이 사람을 보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를 삼았고 밧세바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아가 헷 족속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헷 족속은 가나안 족속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이었던 우리아가 개종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아에게 속한 친적이나 가족이 밧세바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밧세바를 다윗이 데리고 와서 아내를 삼았다는 것은 자신이 우리아의 친족이 되어 기업을 무를 자가 되겠다는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누가 봐도 다윗은 우리아의 죽음에 최선을 다하는 군주의 모습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마저도 자신의 불륜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죄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다윗이 훌륭한 왕처럼 보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다윗은 그저 악을 행하는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떤 타협도 없으시며 죄에 대한 값을 요구하시며 그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는 덮으려고 할 때 누룩처럼 더 큰 죄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다윗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떤 모습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온전하고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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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1:1-13  찬송가: 268장

 

오늘 본문은 다윗이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끔찍한 죄악을 범하는 말씀입니다.

1절을 보면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0장을 보면 다윗의 군대가 암몬과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는데 암몬과의 전쟁에서는 암몬 자손이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 성읍으로 들어가자 요압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암몬이 성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제대로 전쟁을 하지 않고 끝나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말씀을 통해 볼 때 아람과의 전쟁이 끝난 후 암몬과 전쟁을 하려고 했는데 이스라엘의 우기가 시작되는 겨울의 날씨 때문에 전쟁을 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우기가 끝나는 새해가 시작이 되자 다윗은 다시 요단 동편에 있는 암몬을 공격하기 위해서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게 된 것입니다.

요압은 군대를 이끌고 암몬 자손을 멸하고 암몬의 수도인 랍바를 에워쌌는데 역대상 20장을 보면 ‘요압이 랍바를 쳐서 함락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이것이 다윗이 죄를 범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저녁때에 다윗은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다윗이 사는 왕궁은 지대가 높은 시온 산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밑에 백성들이 살던 집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밧세바가 나와서 목욕을 한 것이 다윗을 유혹하기 위하려고 한 행동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욕실이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집 안마당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일반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밧세바는 자기 집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높은 왕궁의 지붕에서 거닐던 다윗이 그것을 본 것입니다.

다윗이 훔쳐보기 위해서 지붕을 올라간 것이 아니라 지붕을 거닐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어떤 악한 의도나 목적이 없이 그냥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지붕 위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았을 때 실례를 했다고 여겨 그냥 돌아섰으면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그냥 헤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보았다는 단어를 보면 ‘그냥 본 것이 아니라 정탐하다, 주목하여 보다, 지속하여 보다, 즐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이 목욕하는 여인을 계속적으로 주목하여 보면서 즐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였다는 단어는 ‘형태’를 의미하는 단어로 저녁이라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형태가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이 더 문제입니다.

3절을 보면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이 누군지 알아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의 부하로 있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정보를 얻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것을 알았으면 거기서 멈추어야 할텐데 이미 정욕에 사로잡힌 다윗에게는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를 데리고 오게 하였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원문으로 보면 ‘밧세바가 다윗에게 오자 다윗이 그녀와 더불어 동침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입니다.

밧세바가 자기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다는 말은 레위기 15장을 보면 ‘남녀가 동침하였을 경우 둘 다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데 밧세바가 동침을 한 후 물로 몸을 씼었으며 부정하게 되는 저녁이 지난 후에야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 뿐만 아니라 밧세바도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밧세바가 다윗에게 잉태하였다는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임신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것입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생각을 하기보다 자신의 죄의 씨앗을 덮을 생각밖에 들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압에게 밧세바의 남편인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고 기별을 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오자 다윗은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한 것을 물었는데 그것은 형식적인 질문이었고 다윗의 마음에는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서 밧세바와 잠자리를 가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 휴가를 주는 것처럼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고 하면서 우리아에게 먹을 식물을 포상금으로 주어서 뒤따라 가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아가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묶는 숙소에서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완전 범죄로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했는데 우리아가 집으로 내려가지 않으니까 다윗이 얼마나 안달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아를 불러서 ‘네가 길 갔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냐 어찌 네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을 하듯이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우리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였다’고 대답을 합니다.

 

우리아의 충성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는 말인데 다윗에게는 그런 우리아의 충심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는 우리아를 집으로 보내 밧세바와 잠을 자게 하여 자신의 죄를 덮으려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택한 방법은 우리아를 취하게 만들어서 집으로 보낼 계획이었습니다.

우리아를 불러서 다윗이 보는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만든 다음에 저녁때 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아가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병사들이 묶는 숙소로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방법이 통하지 않으니까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더 큰 죄악을 계획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죄는 가만히만 두어도 자라고 번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안 지으면 좋겠는데 죄를 지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랬을 때 죄를 안 지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죄를 가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고 빨리 돌아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가 주는 인생의 황폐함을 깨닫고 죄를 안 짓도록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혹 죄를 짓게 되었다면 빨리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죄가 주는 황폐함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풍성함 가운데 살아가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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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0:1-19  찬송가: 397장

 

오는 본문에 나오는 암몬은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이 작은 딸들을 통하여 낳은 벤암미의 후손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암몬 족속과 다투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암몬 족속의 땅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보면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쳐들어 와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하였다고 말씀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무엘상 11장을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처음으로 전쟁을 했던 나라가 암몬이었습니다.

암몬의 왕이었던 나하스가 올라와서 요단 동편 갓 자손에게 속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겠다고 말을 하면서 이스라엘을 쳐들어 오자 사울이 암몬을 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사울과 전쟁을 했던 나하스였습니다.

나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왕이 되자 2절을 보면 다윗이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대적하여 싸웠던 나하스였는데 그가 어떤 은총을 다윗에게 베풀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마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닐 때 사울의 대적이었던 나하스가 사울로부터 다윗을 구해주었거나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하스가 죽자 다윗은 자신이 받았던 은총을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에 그의 아들 하눈에게 조문단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암몬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다윗이 조문단을 보낸 것은 나하스를 공경함이 아니라 이 성을 염탐하고 함락시키려는 음모가 있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안 좋은 말과 의심의 말은 어떻게 마음에 쏙 박히고 감동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 말에 하눈은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수염의 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동 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 버립니다.’

당시 수염은 남자의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였습니다.

수염의 절반을 깎은 것이 길이의 절반을 의미하기 보다 면적의 절반을 깎은 것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중동 볼기까지 잘랐다는 것은 옷을 위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잘라버렸다는 의미로 수치와 모욕을 동시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조문단으로 간 사신들에게 왕궁으로 들어오지 말고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 돌아오라는 말을 합니다.

왕궁으로 들어오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에 사신들을 배려하는 다윗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조문단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었다는 것은 다윗에게 그렇게 한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암몬 자손은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주변 나라들로부터 용병들을 사서 고용을 합니다.

다윗이 보낸 조문단을 순수한 의도를 그대로 받았으면 은총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의심하고 모욕을 준 대가는 용병을 사서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다윗도 소식을 듣고 요압과 온 용사들을 보내는데 요단 강을 지나 암몬 자손의 땅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8절을 보면 암몬 자손이 나와서 자신들의 성문 어귀에 진을 쳤고 돈을 주고 산 용병들은 따로 들에 진을 쳤는데 이들은 요압과 군사들을 뒤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진을 친 것입니다.

 

그러자 요압은 이스라엘의 용사들 가운데 선별한 자들 중에서 또 선별을 해서 특공대원들을 선출합니다.   

 

요압은 남은 용사들을 자신의 아우 아비새에게 맡기면서 앞에 있는 암몬 자손을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선별한 특공 대원들을 데리고 아람 사람을 상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고 하면서 한쪽이 무너지지 않도록 서로를 돕는 전략을 계획합니다.

 

12절을 보면 요압이 아비새에게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사들이 대적을 상대할 때 어떤 자세와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돕고 합력하여 싸우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요압이 아람 사람과 싸우자 아람 사람이 도망하였고 암몬 자손은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암몬에 용병을 보냈던 아람의 군대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군사들을 소집한 것입니다.

 

16절에 ‘하닷에셀’은 아람의 왕으로 아람 지역의 군사들을 소집하여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윗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암몬과의 전쟁을 참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암몬 왕 나하스의 죽음에 조문단을 보낸 것이 암몬을 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거나 군대의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암몬과의 전쟁에서는 ‘요압과 용사의 온 무리를 보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용사는 이스라엘 군사들 가운데 선발한 군사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아람과의 전쟁에서는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넜다’고 말씀하면서 이스라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다윗이 참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아람의 군대가 패하여 도망을 가는데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승의 사람과 마병 사만을 죽이고 또 군대 장관 소박을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닷에셀에게 속했던 분봉 왕들이 이스라엘과 화친을 하여 섬겼고 아람 사람들이 두려워서 다시는 암몬 자손을 돕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 ‘네가 가는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쥐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함께 하시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는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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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9:1-13  찬송가: 310장

 

오늘 본문은 다윗이 대적들과의 전쟁을 통하여 나라를 굳건히 세운 뒤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그의 후손에게 은혜를 베푸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이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은총을 베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보호해 달라는 언약을 맺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다윗의 삶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녀야 했으며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사울로 인하여 다윗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하였지만 다윗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심판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에게 있어 사울의 집은 요나단을 제외하면 별로 좋은 관계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의 집’이라고 말을 하지 않고 ‘사울의 집’이라고 말을 하면서 자신이 은총을 베풀 대상을 요나단의 집으로 제한하지 않고 사울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사울의 집에 종으로 있던 시바를 불러서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서 3절을 보면 다윗이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베풀고자 하는 은총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요나단과 언약을 맺을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베푸는 은총은 하나님께 약속한 언약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을 보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울처럼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교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하나님만을 내타내고자 하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죄의 유혹이 들어갔을 때 그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윗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이 먼저였고 우선이었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 집안의 종이었던 시바는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저는 자라’고 말을 합니다.

사무엘하 4:4절을 보면 ‘요나단에게 므비보셋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유모가 다섯 살인 므비보셋을 안고 급히 도망을 가다가 아이가 떨어져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섯 살이면 걷지 못하는 나이는 아니었을 텐데 아마 사울과 요나단을 죽인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가족을 몰살할 것으로 생각하여 유모가 급하게 도망을 가기 위해서 므비보셋을 안고 가다가 아이를 놓쳐서 일어난 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 13절을 보면 므비보셋이 두 다리를 모두 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았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한쪽이 아닌 두 다리를 모두 절었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설 수 없고 할 수 없는 나약하고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윗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하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그가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 ‘므비보셋을 데려 오게 합니다.

 

6절을 보면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므비보셋이여 하니 그가 이르기를 보소서 당신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므비보셋이 겸손하였기 때문에 다윗 왕에게 자신이 종이라고 대답하였다기 보다 자신을 데리고 오라고 한 이유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집안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7절을 보면 ‘다윗이 그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므비보셋을 부른 이유가 ‘내가 반드시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아마 네게 은총을 베풀기 위함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사울의 모든 밭을 다 므비보셋에게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떡을 먹을 것이라’는 약속을 합니다.

 

사울이 가졌던 모든 밭을 므비보셋에게 주겠다는 말은 사울의 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이 모든 남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는 의미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사울 왕에게 속했던 모든 밭이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다윗에게로 귀속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었을 때 가졌던 밭의 규모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속했던 모든 밭을 므비보셋에게 전부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의 상에서 떡을 먹을 것이라는 말은 므비보셋을 다윗의 아들과 같이 여기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1절을 보면 ‘므비보셋은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약속에 므비보셋은 절을 하며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는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멸시하는 동물 중에 하나가 개였다고 합니다.

 

또한 레위기 21장을 보면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면서 시체로 인하여 부정하게 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이 자신은 ‘죽은 개’라고 표현을 하는 것은 다윗에게 은혜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므비보셋이 어떤 상태였는지가 상관이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다윗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처럼 여기며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풀어 주는 은총은 마치 주님께서 아무 공로 없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상황과 환경이 어떠한지가 문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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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16-23  찬송가: 41장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메어 오는 길에서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면서 축제의 도가니였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사울의 딸 미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여호와의 궤를 맞이하였는데 미갈은 나오지 않고 창으로 내다보았다는 것은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일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궤 앞에서 뛰놀며 춤을 추는 다윗의 모습을 업신여겼는데 이것은 다윗의 행동을 천하고 가치 없는 행동으로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미갈이 전에는 다윗을 사랑하여 그를 살려 주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에 대해서 미갈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었는데 전 남편이었던 발디엘을 잊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 보다 미갈의 이런 행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갈이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궤 앞으로 나오지도 않고 그 앞에서 뛰면서 기뻐하는 다윗의 행동이 이해가 안되고 천박하고 가치 없는 행동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기쁨과 감격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의 반응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여호와의 궤가 들어올 때 춤을 추고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궤를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었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장막은 회막과 같은 단어로 성 안에 회막을 만들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막 안에 언약궤를 둔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사를 드렸습니다.

‘여호와 앞에서’라는 단어는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라는 의미로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예배하는 삶을 얼마나 소망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의 성전에 있었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사모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민수기 6장과 신명기 10장의 말씀을 가지고 당시 축복권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제사장적 권한으로 백성들을 축복하였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성경을 보면 축복권을 제사장 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축복을 하였고,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축복하였으며 백성들은 왕을 위해서 축복하였다는 말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말씀을 할 뿐만 아니라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 주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을 비는 축복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을 축복한 다윗은 모든 백성들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제물로 다윗이 하나님께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모든 백성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7장을 보면 화목 제사를 드린 후에 화목제사를 드린 자들이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다윗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하나님께 화목 제사를 드렸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20절을 보면 다윗이 자기의 가족을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이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돌아오다’는 단어를 보면 ‘가져오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의 가족들이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화목제사를 드린 후에 다윗이 가족들과 함께 화목제물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며 가족들을 축복해 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참여하지 않았던 미갈이 다윗을 맞이하면서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로웠다는 말은 다윗을 행동을 빈정대는 말로 종들이 보는 앞에서 체면도 없이 몸이 드러나게 춤을 추는 꼴이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는 말이었습니다.

 

미갈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다윗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

 

예배가 기쁨이 되는 사람은 그 기쁨을 드러내는 행동이 나타나게 마련일 것입니다.

찬양이 기쁘면 손뼉을 치거나 손이 올리거나 춤을 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배의 방관자였던 미갈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닌 ‘계집종 앞에서’ 다윗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요란을 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고 다윗을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21절과 22절을 보면 다윗이 미갈에게 말을 합니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21절을 보면 다윗은 미갈에게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을 두 번이나 거듭 반복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온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쁨을 드러내며 다른 어떤 것도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지 못한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예배의 방관자인 미갈이 계집종의 눈 앞에서 천하게 보인다고 비난을 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며 기뻐하는 자신이 미갈이 천하게 여기는 계집종에게 오히려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3절을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내라고 말씀하지 않고 사울의 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갈이 사울과 같이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갈에게 자식이 없다는 말은 예배를 천하게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보다 ‘계집종 앞에서’가 중요했던 미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자에게는 열매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미갈과 같이 예배의 방관자가 아니라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놀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진정한 예배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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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1-15  찬송가: 8장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있던 여부스 족속을 쳐서 예루살렘을 빼앗고 그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고 이스라엘 땅을 쳐들어 왔던 블레셋 군대를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안과 밖에 있던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무찌른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려고 하였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1절을 보면 ‘이스라엘에서 뽑은 삼만 명의 군사들을 모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오는 일에 그만큼 다윗이 신중을 기하고 정성을 다하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당시 언약궤가 ‘바알레유다’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역대상 13장의 말씀을 보면 ‘기럇여아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은 장소인데 이름이 다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럇여아림은 사무엘상 7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이스라엘에 다시 돌려 줄 때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들이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다가 70명이 죽음을 당하자 기럇여아림 사람들에게 언약궤를 가져가라고 말을 하였고 그 뒤로 언약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있게 됩니다.

그 때부터 다윗 때까지 약 70여년이 지난 후가 된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오려고 했던 이유에 대해서 2절을 보면 ‘그 궤가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웠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데 3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웃사와 아효는 아비나답의 손자들로 아버지 엘리에살의 뒤를 이어 언약궤를 지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4장을 보면 언약궤는 레위 지파 중 고핫 자손들에게 메라고 말씀하시며 성물은 만지지 말라고 명령하시며 성물을 만지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레위인도 성물을 만져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이 말씀을 알았음에도 새 수레로 언약궤를 옮기려고 하였다기 보다는 언약궤를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언약궤를 정성스럽게 옮기기 위해서 새 수레를 만들어 그곳에 언약궤를 싣고 지금까지 언약궤를 지켰던 아비나답의 자손들에게 수레를 몰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방법은 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을 운반할 때 사용하였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니까 잘못된 행동과 그릇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입니다.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나올 때 아효가 궤 앞에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효가 앞에서 소를 끌고 가고 웃사는 언약궤를 실은 수레 옆에서 이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가면서 5절을 보면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를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이 얼마나 축제였고 기쁨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뛰다는 단어가 넘어지다, 떨어지다는 의미로 소들이 돌뿌리나 어디에 걸려서 넘어질 뻔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가 끄는 수레도 덜커덩 하면서 수레에 실었던 언약궤가 움직이며 떨어질 뻔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언약궤가 떨어지면 큰일 나니까 옆에 있던 웃사가 순발력을 발휘하여 언약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웃사가 잘못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언약궤가 떨어져 부서질 수 있었던 것을 웃사가 붙드는 바람에 떨어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웃사가 잘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너무 심한 것 같습니다. 언약궤를 지키기 위해서 붙잡았을 뿐인데 죽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을 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조차도 웃사가 하나님을 위하여 한 행동 같은데 오히려 그런 웃사를 하나님께서 죽이신 것을 보고 분한 감정이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온갖 악기들로 찬양을 하며 기쁨으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 망쳐 놓고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베레스웃사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베레스는 ‘분열, 틈이 갈라지다’는 의미로 웃사로 인해 분열되고 틈이 갈라졌다는 의미입니다.

분열된 틈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9절을 보면 ‘다윗이 그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하고 언약궤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무서워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민수기의 말씀을 몰랐던 다윗은 언약궤를 붙잡은 웃사의 행동이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행동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가게 합니다.

‘메어가다’는 단어를 보면 그 안에 ‘걷어치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 당시 다윗의 기분은 언약궤를 꼴도 보기 싫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에게 보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메고 오는데 13절에 ‘메다’는 단어는 바로 민수기에서 언약궤를 메라고 말씀하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지 않고 언약궤를 운반하려고 했으며 언약궤를 만지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범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민수기에서 말씀한 대로 언약궤를 메고 기쁨으로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갑니다.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는 말씀은 여섯 걸음마다 제사를 드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섯 걸음을 갔음에도 하나님께서 치시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는데 그 때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입는 에봇은 금실과 자색과 홍색 실로 짜서 만든 화려한 옷이 있었고 베로 만든 세마포 에봇이 있었는데 다윗이 입었던 베 에봇은 제사장들에게 입었던 에봇과는 다른 용도와 목적이었을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웃사가 죽임을 당하였는데 레위 지파도 제사장도 아닌 다윗이 제사장이 입는 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은 기쁨으로 환호하며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다시 이스라엘의 중심에 자리 잡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웃사와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기쁨의 제사를 돌리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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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5:13-25  찬송가: 370장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왕이 되었을 때에도 아내들을 더 두었다고 말씀하였는데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되고 난 후에 더 많은 처첩들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처첩은 아내와 첩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아내와 첩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내와 첩을 구분하지 않고 아내를 첩으로 말씀하는 구절을 볼 수 있지만 야곱의 경우를 보면 종이었던 여종이 아내가 되었을 때 첩으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처첩을 많이 두었다고 말씀하면서 제일 먼저 언급하는 아들들을 보면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통하여 난 아들들입니다.

밧세바의 아들들을 먼저 기록한 이유가 그들 가운데 다윗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윗이 정욕으로 밧세바를 취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의 충신이었던 우리야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잘못을 보여주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아들들을 보면 헤브론에서 난 아들이었던 암몬이 정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복누이였던 다말을 강간하게 되고 정략 결혼을 통해 낳은 압살롬은 형을 죽이고 다윗에게 반역을 하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와서 다윗이 취한 아내와 첩들이 다윗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 보다는 정욕의 산물이거나 주변의 이방국가들과의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정략 결혼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 이하의 말씀은 다윗의 정욕으로 인하여 후에 가족이 분열되고 결국 나라까지 두 개로 나누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잘못이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하고 여전히 정욕과 죄악에서 몸부림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이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며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뿌려진 죄의 씨앗들이 얼마나 악한 열매를 맺는지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그의 부족한 부분들까지 그대로 보여 주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은혜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7절 이하의 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다윗을 찾으러 올라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찾다’라는 단어를 보면 ‘요구하다, 청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다윗을 찾으러 올라왔다는 말씀이 블레셋 군대가 다윗의 목숨을 요구하기 위해 전쟁을 하려고 하였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다윗이 이전에 블레셋의 용병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속국으로 삼고 조공을 받거나 블레셋의 꼭두각시 왕으로 삼으려고 다윗에게 요구하고 청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다윗이 블레셋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는 위협을 가하기 위해서 군대를 예루살렘의 서남쪽에 위치한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게 한 것입니다.

 

그랬을 때 다윗은 블레셋의 군대가 얼마인지 그들이 가진 무기가 얼마나 강한지, 또한 이스라엘의 군대가 블레셋 군대를 이길 수 있는지 계산을 한 것이 아니라 19절을 보면 먼저 ‘여호와께 여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라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눈 앞에 다가왔는데 다윗을 보면 불안과 두려움보다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 같았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안절부절하면서 오도방정을 떨었을 것 같은데 다윗은 위기 속에서 그의 믿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8편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윗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올라가서 싸워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져 주시겠다’는 응답이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망설임 없이 올라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는데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대적을 흩으셨다고 해서 그곳의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고 부릅니다.

바알브라심은 ‘흩으시는 주’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대를 흩어 주심을 기념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시 르바임 골짜기에 가득하였습니다.

 

다윗은 한 번 이겼다고 자만하지 않고 이번에도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뒤를 돌아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그들을 기습하여 블레셋 군대를 무찌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그 때에 여호와가 너보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며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역사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영적 호흡으로 삶에 우선적으로 있어야 할 신앙의 핵심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에게 승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약속입니다.

기도하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는 사무엘하 8장의 말씀처럼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우리로 승리하게 하시는 역사가 우리의 삶에도 일어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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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5:1-12  찬송가: 312장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울의 아들이었던 이스보셋이 죽은 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와 이스라엘 왕이 되어달라고 청원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2장을 보면 다윗을 찾은 사람들을 지파별로 모두 합치면 약 35만명 정도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 왕이 되어 달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 골육이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왕의 자격을 말씀할 때 타국인을 왕으로 삼지 말라고 하셨는데 다윗이 우리의 한 형제이기 때문에 왕이 될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전에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입하게 하신 분이 다윗이었다’는 것입니다.

출입하게 하다는 말은 전쟁을 지휘하였다는 의미로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다윗을 칭송하였던 것처럼 다윗이 더 뛰어난 지휘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세우신 왕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서 혈통과 자격과 하나님의 택하심 모두를 갖춘 진정한 왕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오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고 장로들은 기름을 부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그들과 언약을 맺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로 간의 언약이 아닌 다윗이 장로들에게 언약을 지키도록 약속하게 하였다는 의미이고 그 언약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왕의 언약을 다윗이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맹세하게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다윗을 원해서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심으로 택하신 왕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삼십 세에 헤브론에서 유다 왕으로 등극하여 7년 6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린 후에 모든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여 33년을 다스린 것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 나이는 많아야 15세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결코 평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길을 걸어갈 때 그 길이 평탄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그 길은 좁고 험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며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난 다음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읍을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은 당시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이방인의 땅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정복하지 못한 땅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여부스 족속의 성이 있던 예루살렘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이후 제일 먼저 예루살렘을 치려고 한 이유는 아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이방인이 차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선적으로 따르기 위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이 살던 헤브론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위치적으로 남쪽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이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기에 좋은 위치를 고려하고 종교적인 행사를 치루기에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했을 때 여부스 사람들은 다윗을 조롱을 하는데 사사 시대에도, 사울이 통치할 때도 점령을 당하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을 보면 다른 지역보다 높은 산지에 위치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위는 가파른 골짜기로 되어 있어서 공격하기가 어려운 천예의 요새였기 때문에 여부스 사람들의 조롱이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네가 결코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맹인과 다리 저는 자라도 너를 물리칠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조롱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7절을 보면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 성은 예루살렘의 남동쪽에 위치해 있던 구릉지대에 세운 요새였는데 이곳을 빼앗음으로 예루살렘 온 지역을 점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제일 처음 점령한 시온 성을 다윗성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시온 성을 점령하였던 방법은 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물을 길어 올리는 수로를 통해서였습니다.

이 수로는 성 밖에서 성 안으로 물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수직으로 만든 통로였다고 합니다.

아마 여부스 사람들은 수로를 통해서 공격해 오리라고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다윗은 이 수로를 통해 적진에 들어가는 자는 후한 상급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고 요압과 군사들이 올라가서 성을 차지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잠언 16장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일을 이루시고 성취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능력과 힘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강성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능력이나 재력이나 여건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인줄 믿습니다.

다윗을 보면 어려움과 힘든 과정에 있었을 때에도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여겼을 때에도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왕으로서의 일을 감당해 나갈 때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자 11절을 보면 두로 왕 히람이 화친을 청하며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2절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세우사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나라를 높이신 것을 알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았다는 단어는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는 의미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함께 하였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일을 이루어가시는 일들을 경험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일임을 깨달아 아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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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3:1-11  찬송가: 440장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윗이 헤스본에서 유다 왕으로 7년 6개월을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보셋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으로서 통치를 하고 있었는데 이스보셋과 다윗의 전쟁이라고 하지 않고 사울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보셋이 왕으로서 힘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져 가고 다윗의 집이 점점 강해져 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의 이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27편을 보면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씀하면서 자식이 많은 것이 힘의 상징이며 복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강성해졌다고 말씀한 뒤에 다윗의 아들들을 말씀하는 것이 다윗이 강해진 결과와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씀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말씀은 오히려 다윗의 힘이 강성해지면서 저지른 실수와 잘못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아들들로 인하여 가정이 깨지고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나은 아들들을 보면 어머니가 모두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으로 갈 때 그에게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브론에서 7년 6개월 있는 동안 4명의 아내를 더 두어 여섯 명의 아내를 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다윗의 세 번째 아내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술은 요단 동편에 있던 지역으로 그술 왕 달매는 다윗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동맹국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술 왕의 딸 마아가와 결혼을 한 것이 정략 결혼이라고 말을 합합니다.

나중에 솔로몬이 다윗의 이런 모습을 답습하여 우상을 섬기는 원인이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아가와 정략 결혼을 통하여 난 아들이 압살롬이었는데 압살롬을 보면 형 암논을 죽이고 다윗에게 반역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많은 아내로부터 많은 자녀들을 낳은 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강성케 하시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쫓았던 다윗이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정욕과 거리가 먼 삶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결국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전쟁에서 죽게 만드는 죄악을 범하게 되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왕의 권력을 가진 다른 왕들과 비교해서 그리 큰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정도 쯤이야’하는 마음이 들 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 질서가 무너질 때 그가 설령 다윗이었다 하더라고 그 가정이 얼마나 파괴될 수 있는지 교훈을 주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뜻을 이루어 가시고 강성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죄악까지 눈감아 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고 죄의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로 강성하여졌지만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가정이 분열이 되는 원인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말씀 같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는 동안에 아브넬이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에서 실질적인 왕권을 가진 사람은 이스보셋이 아니라 아브넬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인 권력을 잡은 아브넬은 이제 사울의 첩과 통간하는 일까지 벌이게 됩니다.

 

그런데 권력의 힘을 상실한 이스보셋은 아브넬을 처벌하지 못하고 그저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고 따질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에 매우 화를 내면서 말을 합니다.

‘내가 유다의 개 머리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겨 주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인데 나를 유다의 개와 같이 하찮은 존재로 여기느냐는 것입니다.

리스바와 통간한 것은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나를 유혹했기 때문인데 그 여인의 허물을 왜 나에게 돌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것을 자신이 이룰 수 있도록 이스보셋을 떠나 다윗을 따르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서 오히려 화를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두려워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유명무실한 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권력에 끌려가다 보면 이스보셋과 같이 세상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유명무실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강성케 하셨음에도 육신의 정욕을 버리지 못함으로 가정이 무너지고 공동체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역사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나가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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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12-32   찬송가: 342장

 

오늘 본문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운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과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의 군대 장관인 요압이 기브온에서 전투를 하게 되는데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먼저 기브온을 차지하기 위해서 군사들을 이끌고 내려옵니다.

 

기브온은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땅이었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하면서 유다 족속을 앞박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의 군대장관인 요압도 군사들을 이끌고 나와 서로 대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못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데 14절을 보면 ‘아브넬이 요압에게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는 제안을 하자 요압도 ‘일어나게 하자’라고 수락을 합니다.

 

이것은 블레셋을 대표한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도발하였던 것과 같은 전투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열두 명을 선출하여 대표로 나오게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스라엘에서는 꽉차다는 의미의 수가 12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열두 명을 선출하였거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해서 12명이 나온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양 진영을 대표해서 열 두명의 군사들이 나와서 싸움을 하는데 16절을 보면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싸움의 방식이 머리채를 잡고 누가 먼저 죽나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싸운 곳의 이름을 헬갓 핫수림이라고 불렀는데 뜻이 ‘날카로운 칼의 밭’이라는 의미입니다.

각 진영에서 나온 열 두명의 군사들이 날카로운 칼로 용맹스럽게 싸웠는데 그 결과는 모두 죽음으로 승부가 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을 보면 양측의 군사들이 전면전을 벌이게 됩니다.

전쟁의 결과는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인 요압 군대에 의해 패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 진영에는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들노루 같이 빠르게 달리는 아사헬이 도망가는 아브넬의 뒤를 쫓아갑니다.

 

사무엘하 23장을 보면 아사헬에 대해서 다윗의 삼십 인의 용사 중 한 명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용맹하였지만 형들보다 싸움을 잘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아사헬이 혼자서 아브넬을 쫓아간 이유는 이스라엘 군의 우두머리인 아브넬을 자신이 죽여서 자신이 전쟁의 일등 공신이 되고자 하는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을 죽이기 위해서 뒤를 쫓아간 것입니다.

 

아사헬이 쫓아오는 것을 본 아브넬은 21절을 보면 ‘너는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나 가서 청년 하나를 붙잡아 그의 군복을 빼앗으라’고 말을 합니다.

 

아브넬은 아사헬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공을 인정 받으려고 하다가 자신에게 죽으ㅁ을 당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군사를 붙잡으라고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22절을 보면 아브넬이 ‘너는 나 쫓기를 그치라 내가 너를 쳐서 땅에 엎드러지게 할 까닭이 무엇이냐 그렇게 하면 내가 어떻게 네 형 요압을 대면하겠느냐’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넬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다윗이 사울 밑에서 군대의 장이 되어 싸울 때 아브넬과 요압이 서로 친한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보다는 아브넬은 자신이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다윗의 군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윗에게 가려는 계획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요압의 동생을 죽이는 것이 자신의 행보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아사헬은 물러가기를 거절하고 아브넬을 쫓았는데 결국 아브넬의 창에 아사헬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사헬의 모습을 보면 자신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모한 행동과 과욕으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상황이 멈춰어야 할 때이고, 자신을 돌아볼 때이고, 기도할 때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할 때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교만과 욕심 때문에 멈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고집대로 일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교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교만이 고개를 들면 머지않아 사단의 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24절을 보면 요압과 아비새가 뒤를 쫓아 가는데 해가 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베냐민 족속과 함께 있던 아브넬은 휴전을 제의합니다.

 

전쟁을 주도하였던 인물이 아브넬이었는데 그는 유다까지 손에 넣으면 자신이 왕으로 세운 이스보셋 위에서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권세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계획과 야망이 실패로 끝이 나면서 도망가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동족끼리의 전쟁이 아브넬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26절을 보면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라고 말을 하면서  오히려 요압의 잘못처럼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27절을 보면 요압은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볼 때 요압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지만 아브넬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넬의 도발로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되었을 전투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브넬을 쫓던 군사들에게 나팔을 불고 추격을 멈추고 돌아가게 됩니다.

 

아브넬에 의해서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죽음을 당한 것은 요압에게는 아주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에 사무엘하 3장을 보면 요압이 아브넬에게 복수하는 것을 보면 그에 대한 복수심이 있었지만 더 이상 같은 동족끼리의 피를 흘리지 않기 원하는 마음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상자를 보면 요압 진영에서는 총 20명의 사망자를 냈고 아브넬 진영에서는 베냐민 사람들을 합쳐 360명이 전사자가 나옵니다.

 

이것을 볼 때 요압 진영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승리라고 할 수 없는 상처만을 남기는 전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의지함으로 참된 승리를 거두며 살아가시기를 우리의 인생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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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2:1-11  찬송가: 384장

 

다윗은 사울이 죽은 후 더 이상 사울을 피해서 블레셋 지역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족속인 유다의 한 성읍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죽었기 때문에 다윗이 블레셋을 떠나 이스라엘로 올라가는 것은 굳이 기도를 하지 않더라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일 앞에서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가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불리웠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같았으면 기도를 하더라도 먼저 결정하여 올라간 다음 하나님 인도해 주세요 라고 할 것 같은데 다윗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삶의 터전을 옮길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것은 내가 살기 좋은 환경이나 상황을 살펴보려고 할텐데 다윗은 하나님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물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어떤 특별한 능력을 받았거나 강력한 기적이 다윗을 통하여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가졌던 특별한 능력을 말한다면 그는 항상 쉬지않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시편이나 사무엘서를 통해 다윗이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나 항상 기도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했으며 기도함으로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기도가 능력인줄 믿습니다.

기도는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반복이 될 때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은혜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기도를 보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무런 향방 없이 그저 허공을 치는 기도가 아님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먼저 자신의 계획을 하나님께 아뢰며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도 좋습니까?”

다윗은 유다 지파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울의 추종세력과 충돌하지 않고 또 자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유다 지파로 들어가기를 원하였고 그렇게 계획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올라가라는 응답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자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이것은 자신이 계획을 하였지만 자신의 욕심과 뜻대로 행동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겠다는 순종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을 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가기를 원한다는 기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 일이 해결되지 않고, 실패하는 경우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보다 자신의 성급한 마음이나 욕심으로 일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실패했던 예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창대케 하시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이루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자녀가 없자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여종 하갈을 통하여서 자녀를 얻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드는 일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평생의 가시가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으면 이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일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엎드려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헤브론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다 사람들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이 이미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유다 사람들에게 또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유다의 공식적인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이 왕 위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한 행동이 사울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낸 야베스 사람들에게 사자들을 보내 그들의 수고를 치하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행동이 사울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으며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 달라는 어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야베스 사람들의 선행을 진심으로 치하하고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선대한 것에 대한 보답의 차원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야베스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는 말은 은혜와 진리였습니다.

사울에게 은혜를 베푼 야베스 사람들의 진심 어린 행동에 하나님께서 은혜와 진리로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고 다윗 또한 야베스 사람들의 선한 일에 대하여 같은 은혜와 진리로 보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을 보면 ‘이제 너희는 손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너희 주 사울이 죽었고 또 유다 족속이 내게 기름을 부어 그들의 왕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암몬 족속으로부터 야베스 사람들을 구원해 주어 안전할 수 있었는데 사울이 죽었다는 사실은 야베스 사람들이 다시 대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야베스 사람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면서 유다 족속이 나를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제 내가 당신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다윗의 다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8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고 다윗과 대치되는 상황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있었던 다윗이지만 그의 인생을 보면 왕이 되는 과정이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은혜라고 말한다면 다윗은 은혜 받은 자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였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다윗의 삶은 항상 대적자들이 위협하고 사방의 길이 막힌 것 같은 힘든 길들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문제가 없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문제로 인하여 인생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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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17-27  찬송가: 540장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다윗도 시글락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간 아말렉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한 사울은 자살함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윗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가족들을 무사히 데려오게 됩니다.

 

어제 말씀을 보면 다윗은 사울 진영에 있던 아말렉 사람으로부터 블레셋과 이스라엘 전쟁 소식을 듣게 되는데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다윗이 어떻게 알았는지 묻자 그 사람은 부상을 당한 사울이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사울이 살 수 없을 줄을 알고 사울을 죽이고 사울의 머리에 있던 왕관과 팔고리를 내 주께 가지고 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지난 주에 사울은 자신의 병기 잡은 자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을 하였음에도 병기 잡은 자가 그렇게 하지 못하자 사울이 자신의 칼에 엎드러져 자결을 하였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사울을 자신이 죽였다고 말한 것은 다윗이 사울의 적이라는 것을 알고 다윗에게 사울을 죽인 공로를 인정받아 대가를 얻으려고 거짓말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멜렉 사람의 말을 들은 다윗은 자기 옷을 잡아 찢고 슬피 울며 금식을 하였고 아말렉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면서 그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난 다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가를 짖고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고 명령을 합니다.

 

노래의 제목은 ‘활의 노래’였고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활의 노래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사울의 죽음이 활에 의한 것이어서 그랬든지, 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가 활을 잘 쏘는 족속이었기 때문이든지, 요나단의 활로 사울의 죽음을 알려 다윗이 도망갈 수 있게 되었든지, 아마 사울과 요나단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활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야살의 책은 여호수아 10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에서 ‘태양과 달을 멈추라’고 했을 때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않았다’는 내용이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야살’이라는 이름이 ‘의롭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로운 행동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책으로 다윗 시대 때 작성된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면 사울을 대적으로 기록하며 하나님께서 대적을 물리쳐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과 요나단을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이 슬퍼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사울에 대해서는 다윗이 시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야살의 책에는 사울을 위해서 슬퍼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 형식적인 표현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 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시편에서 사울을 대적으로 표현하며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실 것을 기도하는 내용들은 다윗 개인이 당하는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구였다면 오늘 본문의 노래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큰 슬픔인지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한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 얼마나 슬픔이었고 진심이었는지 그의 애가를 통하여 느낄 수 있습니다.

 

사울의 죽음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심판으로 인한 죽임이지만 그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는 기쁨이 되고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길보아 산을 향하여 ‘너희 위에 이슬과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을 바칠 밭도 없어지라’고 저주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길보아 산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비극의 장소가 되었는지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방패에 화살이 미끄러지라고 기름을 발랐는데 이제 그의 죽음으로 그런 일이 필요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22절 말씀은 사울과 요나단의 공적을 표현하는 내용으로 요나단의 활과 사울의 칼이 대적을 칠 때 결코 빗나간 적이 없고 허공을 치지 않고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울과 요나단은 이전의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이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3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살아 있을 때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에게 기쁨이 되었는데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않고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던 용사들이었다는 말은 그들이 비록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군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24절은 사울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용맹하게 싸웠기 때문에 승리의 전리품으로 이스라엘이 안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면서 이제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함께 슬퍼하고 애통해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25절과 26절은 요나단을 향한 애가의 내용으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던 것이 다윗에게는 심히 기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하면서 다윗에게 보였던 요나단의 우정에 대한 감사를 드러내며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죽음은 그렇다 하더라도 사울의 죽음은 다윗에게는 애통보다는 더 이상 도망다니거나 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사울을 위해서 애가를 부르는 것은 형식적인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드러내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애가는 왕을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애가이며 또한 한 사람의 이스라엘 백성인 자신에게도 슬픈 일임을 애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 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각하는 다윗의 마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에 맡기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갈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쓰임 받는 삶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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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35-53  찬송가: 150장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말씀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십자가형을 언도 받은 시간은 요한복음 19:14절을 보면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지금 시간과 같은 로마 시간을 말씀하고 있으며 다른 복음서들은 유대 시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형을 언도 받은 제육시는 지금의 오전 6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5:25절을 보면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제 삼시는 유대시간으로 지금으로 하면 오전 9시입니다.

사형을 언도 받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3시간 동안 올라가셨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이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었는데 시편 22:18절에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았다’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죄수의 죄패를 붙이는데 빌라도가 쓴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죄패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요구하였지만 빌라도는 ‘내 쓸 것을 썼다’고 하면서 거절합니다.

그 때 예수님과 두 명의 강도 둘이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게 됩니다.

 

그리고 3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모욕하였고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였는데 이것도 시편에서 예언한 말씀이 성취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제육시’는 오후 12시로 가장 밝아야 하는 낮 12시부터 제구시 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흑암에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가운데 9 번째 재앙이 흑암의 재앙이고 10번째 재앙이 장자의 죽음입니다.

 

흑암의 재앙이 지난 뒤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죽음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며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6절을 보면 어둠이 걷히는 제구시, 오후 세시에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이 모두 7개가 되는데 이것을 가상칠언이라고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세 번 말씀하시는 것이 나오는데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기도와 한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하였을 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하셨고 운명하시기 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회개하는 자들의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숨지시기 전 ‘내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한다’는 말씀은 영혼을 구원하는 주권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세 개의 말씀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 마리아와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향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씀과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시는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등장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창세기에서 말씀한 ‘여자의 후손’으로 계시된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 되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을 성경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뜻과 구원 계획을 모두 성취하고 완성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씀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 그로 상함을 받게 하셨다는 말씀과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고난과 질고를 당하시는 어린 양이 되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47절을 보면 거기 있던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는가 보자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8절은 예수님께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을 하시자 그 중 한 사람이 신포도주를 해면에 적셔서 예수님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아마 목마르다고 하신 예수님의 갈증을 해갈해 주고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남은 사람들은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고 하면서 끝까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대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잠시 뒤 예수님은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십니다.

크게 소리 지르신 것은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다’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5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는데 성소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으로 이 휘장을 통해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일년에 한 번 지성소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찢겨져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누구든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자리에,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을 예표해 주는 징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9:20절을 보면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무덤이 열리며 자던 성도들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들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다시 살아날 것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일어난 일을 통해 로마 군인이었던 백부장은 두려워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의 입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사실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어난 일들을 통해 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실 수밖에 없다는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철저하게 외면당하시고 고통당하시며 유월절 어린양과 같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음을 입고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증인이 되어 믿음의 주가 되시고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을 따라가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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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7:15-26  찬송가: 144장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고발로 이제 예수님께서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대제사장들이 새벽에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고발하기 위하여 로마의 재판장으로 끌고 가는데 자신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으려고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빌라도를 관정 밖으로 나오게 하여서 재판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과 접촉하거나 이방인이 접촉한 물건에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되어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척 하지만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7:11절을 보면 관정 밖으로 나온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역사가 요세푸스가 유월절에 3천명의 유대인들을 제단에서 죽였다고 기록한 것과 같은 사건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빌라도는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그의 포악함 때문에 더 이상 유대인들의 반발이 일어날 경우 그를 총독직에서 파면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재판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면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대제사장들과,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재판장인 빌라도가 거룩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재판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재판을 주관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대제사장들의 고발 내용이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로마에 반역하여 자칭 왕이 되려고 하는 행악자요 반역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왕이냐’는 질문을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18장을 보면 더 자세한 내용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가 한 말이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말을 하자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러면 네가 왕이냐’라고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고발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모습은 이사야 55장에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침묵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보통 법정에 서면 자신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한 주장을 하는데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을 하지 않자 빌라도는 크게 놀랐으며 재판이 진행될수록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하였고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서 넘겨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명절에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를 이용하여서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론된 사람은 바라바였는데 누가복음을 보면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강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강도라는 단어는 당시 ‘로마에 반란을 꾀하는 사람들을 부를 때 사용하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민란을 일으켜 유다의 독립을 주도했던 정치범이었을 것으로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과 바라바 놓고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고 말하는 이유는 ‘정치범인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하면 자신도 바라바와 같이 반란을 꾀하는 자로 몰릴 수도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연히 예수님을 놓아달라고 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19절을 보면 빌라도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놓아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재판을 통해서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아내의 꿈을 통해서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확신으로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대제사장에게 설득 당한 백성들은 빌라도가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는 말에 일제히 바라바를 놓아 주어야 한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는 말에 백성들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 더욱 소리를 지릅니다.

일주일 전에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찬양했던 사람들이 대제사장의 말에 넘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24절을 보면 ‘빌라도가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사람들에게 죄를 전가하며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형을 언도해 버립니다.

 

백성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사형이 정당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선고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전가하며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선고를 냅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으며 자신의 이익에 손해를 끼친 예수님을 거짓으로 고발하며 사람들을 선동하며 죽이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제사장의 말에 넘어가 찬양의 소리가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저주의 소리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들의 모습에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외로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시기 위해 부당한 대우와 재판의 판정에도 말없이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시며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모습 속에 빌라도와 같이 변명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죄가 있지는 않은지 거짓과 속임수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모는 대제사장의 모습은 없는지 사람들의 말에 왔다 갔다 흔들리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속에 내가 있지는 않은지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면 말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던 모습이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보여 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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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36-50   찬송가: 290장

 

누가복을 2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란 산으로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시면 습관적으로 가셔서 기도하던 장소가 감란 산에 있는 겟세마네였습니다.

 

감란은 지금의 올리브를 의미합니다.

감란 산에 올리브 나무가 많이 있어서 이름이 감란 산으로 불렸고 겟세마네는 감람 산 골짜기에 위치하였는데 그곳에서 올리브 기름을 짜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만드는 틀 이름이 ‘겟세마네’였기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겟세마네’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겟세마네에 도작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신 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가십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험의 때가 곧 다가오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기도로 준비해야 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조금 나아가신 후 기도를 하시는데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오늘 본문에서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37절을 보면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올라 오셔서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예수님도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다가올 십자가의 고난이 고민이 되셨고 괴로움과 슬픔의 감정들이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셨지만 또한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께도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너무 힘들고 괴로운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며 함께 깨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신 것입니다.

 

기도가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마태복음 18장에서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역사가 더 강력하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길이 기도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십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릎을 꿇고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먼저 나의 기대를 간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는 것이 나의 바람과 기대입니다. 그렇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간구하십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주시는 마지막 교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원대로 응답해 주세요. 그것은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피하는 것입니다. 라는 기도를 드린 후에 ‘그렇게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하고 기도를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로 끝을 맺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르다면 ‘내 원대로 마시옵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셨는데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실 만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첫 번째 기도를 끝내신 후 제자들에게 내려 오셨는데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남을 위해서 중보기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잠에 든 베드로를 깨우시며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말로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도 남았던 제자들이었지만 육신의 피곤함과 잠 앞에서 잠시도 예수님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두 번째 올라가셔서 기도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가 한 번에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기도의 끈을 붙잡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기도하시는 내용을 보면 ‘나의 원대로’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내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일 마시지 않고는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없다면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하시며 내가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구를 하십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시고 내려오셨는데 제자들은 자고 있었는데 그들의 눈이 무거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그들이 예수께 무엇으로 대답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깨우셨을 때 잠을 자고 있는 자신들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세 번째 기도하러 올라가셔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기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따를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천사들이 힘을 더했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실 때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원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시는 순종이 이처럼 간절하고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 번의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의 원대로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실 준비가 되셨습니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지만 일어나 함께 가자 라고 말씀하시며 고난과 슬픔과 두려움이 아니라 강하고 담대함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원대로 순종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일어나 함께 가자 라고 강하고 담대함으로 선포할 수 있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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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26-35  찬송가: 265장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말씀인데 이 때가 무교절의 첫날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루의 첫날은 해가 질 때 시작하기 때문에 무교절의 첫날은 목요일 저녁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유월절 양 잡는 날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마찬가지로 목요일 저녁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음식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갈릴리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던 제자들은 어디에서 예수님께서 식사를 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와 같이 제자들을 성읍으로 보내시면서 성안의 아무에게 가서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는 말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헌신한 사람의 집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데 오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마지막 순간에도 가룟 유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한 사람씩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을 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면 가시는 기도 장소가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것을 알고 이미 대제사장들과 예수님을 체포할 계획을 다 짜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아니라고 자신 있게 거짓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다’는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다른 제자들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면 가룟 유다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는 기록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가시지만 인자를 파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하였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말씀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시지만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귀의 도구가 되어 죄악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가 되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하였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양심이 화인 맞은 가룟 유다는 깨닫지를 못하고 결국 예수님을 배반하고 맙니다.

기회 지나가기 전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킬 수 있고, 회개할 때 회개하며, 붙잡고 순종할 때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오늘 본문의 주의 만찬, 성찬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식사를 하시던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말씀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성찬을 할 때 빵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가복음과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것을 행함으로 ‘주님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을 행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기억하고 기념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 죽으심에서 죄사함의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 되었던 관계를 십자가를 통해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성찬을 통해 주님을 기념할 뿐 아니라 “주의 죽으심을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29절의 보면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이 있으며 주님의 신부로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을 예표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미하고 감란산으로 나아가는데 31절과 3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스가랴 13장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붙잡히는 것을 보고 십자가의 고난을 피해 다 도망을 가겠지만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부활이 실체이며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을 다시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라는 말씀에 꽂혀서 강하게 반발을 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는 고백을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 속에는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같이 평가하시는 것이 못마땅하고 수제자인 나를 어떻게 그렇게 평가하실 수 있냐는 자신을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려도 나는 그들과 달라서 주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교만을 드러냅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하여 예수님은 ‘오늘 밤 달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베드로의 교만과 의지가 얼마나 허무하게 넘어질 수 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도 지지 않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주님의 말씀에 반발하며 강한 의지를 드러냅니다.

 

그러자 모든 제자들도 베드로에게 질 수 없다는 듯이 그와 같이 말을 합니다.

제자들의 고백이 거짓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의 고백은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더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보다 나를 더 신뢰하려고 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주님의 길을 갈 수 없으며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보이던 제자들과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갔으며 주님을 부인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비로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주님의 뜻과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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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0:16-31  찬송가: 429장

 

아말렉을 뒤쫓아 가던 상황에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병들어 죽어가던 애굽 소년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는데 그 소년으로 말미암아 아말렉 군대가 있는 곳을 추격할 수 있었습니다.

애굽 소년의 뒤를 따라서 다윗과 4백 명의 사람들은 아말렉 군대가 있는 곳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아말렉 군사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 때문에 남자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성읍을 지킬 군사들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아말렉은 블레셋과 유다 성읍들을 공격하여 약탈하였고 자신들을 공격할 여력이 없다고 여기고 온 땅에 흩어져 마음껏 먹고 마시고 춤을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이 취해서 깊이 잠든 새벽을 이용해 공격을 감행합니다.

17절을 보면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소년은 군사보다는 하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술 취한 아말렉의 군사들은 모두 전멸하였고 낙타를 돌보는 하인들만 낙타를 타고 도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승을 거둔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이 탈취하였던 모든 것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고 두 아내도 무사히 구하게 됩니다.

 

19절을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들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도로 찾아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말렉 군사들을 모두 진멸하고 빼앗겼던 것을 모두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다윗의 진영에는 어떤 피해도 없이 모두 무사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탈취한 것들을 가지고 돌아오게 되는데 21절을 보면 피곤하여 다윗을 따르지 못하였던 이백 명이 있는 곳으로 오자 그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을 영접하러 나왔고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탈취한 전리품 때문에 문제가 발생을 하게 되는데 다윗과 함께 아말렉을 추격하다가 힘들어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던 이백명에게 탈취물을 분배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체력이 안돼 다윗과 함께 추격하지 못하고 뒤에 남았던 사람들은 함께 싸우지 못한 미안함과 걱정으로 승리하고 안전하게 돌아온 다윗 일행들을 반갑게 영접하고 문안을 하였는데 다윗과 함께 싸웠던 사람들 중에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맞이하는 이백명은 그들의 안부를 걱정하였는데 악한 자와 불량배들은 우리가 탈취한 것을 이들과 나눌 수 없다고 하면서 각자 자기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떠나다는 말을 보면 ‘사라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말은 도움이 안되는 이 사람들을 우리 공동체에서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도 자신들의 재산과 아내와 자녀들을 빼앗긴 상태였고 다윗과 함께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고 가다가 힘과 능력의 한계 때문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빼앗긴 재산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그냥 아내와 자녀들만 데리고 우리 공동체에서 사라지라는 것입니다.

 

악하다는 말은 ‘해롭다’는 의미가 있고 불량배라는 말은 ‘파괴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싸웠기 때문에 싸움에 대한 대가로 탈취한 물건을 가질 수 있지만 싸우지 않았으면 가질 자격이 없다는 이들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다윗을 돌로 치자고 선동하였던 무리들이었을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들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방법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말이 정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세상과 구별됨이 없는 공동체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익과 손해로 사람을 판단함으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그런 그들에게 다윗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아말렉 군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겨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탈취물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24절에 ‘이 일에 누가 너희에게 듣겠느냐’는 말씀은 하나님께 소유권이 있는데 너희의 욕심대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쟁터에서 싸움을 했던 자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 모두가 동일한 분배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그 은혜를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정한 이것이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성과 중심을 말하는데 믿음의 공동체는 은혜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 뿐만 아니라 유다 장로들에게 전리품을 보내 각 성읍 사람들에게 탈취한 것을 분배 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7절 이하의 말씀에 여러 성읍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아마 이 성읍들은 아말렉 사람들의 공격에 약탈을 당했던 곳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탈취한 전리품을 보낸 것은 그들이 빼앗긴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는 다윗과 전쟁을 참여한 사람들 만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의 승리가 되었으며 빼앗긴 것을 되찾는 기쁨의 날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의 승리가 교회가 보이는 승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나의 유익 만을 위한 승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함께 나누며 함께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승리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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