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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30:1-15  찬송가: 365장

 

블레셋의 용병으로 이스라엘과 전쟁에 참여할 뻔하였던 다윗은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던 아벡에서 시글락까지 오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시글락에서는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네겝과 시글락을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여인들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다 사로잡아 끌고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겝은 블레셋과 경계를 둔 유다에 속한 지역이었고 시글락은 원래 시므온 지파에 속한 땅이었는데 블레셋에게 빼앗긴 지역이었습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모두 전쟁을 하기 위해서 군사들을 징집하였기 때문에 성에는 남자들이 없고 여인들과 아이들 뿐이었을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은 그 때를 이용해 네겝과 시글락을 쳐서 성읍을 불사르고 여인들과 자녀들을 모두 사로잡아간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 성읍을 불살랐던 이유는 다윗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읍의 여인들과 아이들을 죽이지 않고 사로잡아간 것은 노예로 팔거나 종으로 부리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시글락으로 돌아왔을 때 성읍은 불에 탔고 다윗의 아내였던 아히노암과 아비가일 뿐만 아니라 모든 여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사로잡혀간 상태였습니다.

 

4절을 보면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으로 들어온 이유는 사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이유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읍이 불에 타고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혀가 버린 것입니다.

모든 기대와 소망이 사라져버린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6절을 보면 다윗과 함께 했던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윗과 함께 하기 위해서 기꺼이 사울의 대적이 되었고 도망자가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라면 목숨을 내놓고 전쟁에도 참여하고 싸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다윗을 돌로 쳐서 죽이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일어난 책임이 모두 다윗 때문이기 때문에 다윗을 돌로 죽여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이유가 그들의 자녀들 때문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자녀 문제에 부딪치면 이성적인 판단이 마비되고 감정 컨트롤이 상실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의 말에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급하다는 말은 ‘자신도 괴로운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할 뻔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성이 불에 타고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혀가 슬픔에 사로잡혀 있는데 믿고 따랐던 백성들마저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윗도 크게 다급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다윗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용기를 얻었다는 말은 ‘달라붙다, 회복하다, 강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일상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삶이었으며 대적과 싸워 승리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힘입고 용기를 얻으니까 다윗을 향하여 돌을 들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7절을 보면 다윗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에봇에는 우림과 둠밈의 흉패가 있어 하나님의 판결을 물었는데 다윗은 지금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판결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심각한 상황에서 너희들이 나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거나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한 일이 얼마인데 하면서 나를 그렇게 대하느냐고 자신을 변호하거나 싸우기 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로잡혀간 가족과 백성들을 다시 찾을 수 있는지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 잡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대답을 하십니다.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한 육벽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힘들어서 따라올 수 없는 이백 명의 사람들은 시냇가에 머물게 하고 나머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갑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1절과 12절을 보면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은 그대로 지나치면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사람들은 아말렉을 쫓아가기도 바쁜 상황이었을 덴데 애굽 사람을 도왔다는 것은 그가 가족들의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긍휼의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운 애굽 소년으로부터 아말렉 사람들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병들어 죽게 되었던 애굽 소년을 기도 응답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만약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애굽 소년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급하다고 그냥 지나쳤다면 아말렉 사람들을 찾는 일이 더 힘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쁜 중에도 긍휼을 베푸는 손길을 통해 아말렉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열쇠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는다면 길을 열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소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손길이 하나님의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돌아보는 한 영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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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9:1-11  찬송가: 383장

 

 

사무엘상 27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망을 다니다가 자신과 함께 있는 육백 명을 이끌고 블레셋의 가드왕 아기스의 용병이 됩니다.

시글락을 얻은 다윗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대적인 아말렉과 그술과 기르스 사람들을 치고 돌아와 아기스에게는 유다 사람을 쳤다고 말을 합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으면서 동시에 사울의 손에서 안전하게 피할 수 있고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치는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28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하게 됩니다.

그러자 사울은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하나님께 물었지만 응답하심이 없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됩니다.

 

거기서 사울은 하나님께서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를 떼어 다윗에게 주셨다는 말씀을 듣고 낙담하여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군대를 모아 아벡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을 치게 된 것입니다.

 

가드왕 아기스에게 신임을 얻은 다윗은 아기스의 뒤를 따라 블레셋의 용병으로 참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참전을 하게 된 이유가 28:1절을 보면 가드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라’고 명령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기스의 말에 다윗은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실 것이라’고 하면서 참전하겠다는 대답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만약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을 하면 다윗이 블레셋 편에 설 수 없다는 의미가 되고 그에 대한 결과는 시글랏에 거하는 다윗의 가족과 사람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블레셋의 용병으로 참전을 하게 되는데 현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블레셋을 도와 이스라엘을 공격하자니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써 하나님의 군대를 칠 수 없었고 블레셋 편에 서지 않겠다고 하면 자신과 함께 한 가족과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이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이 참전하는 것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이 사울의 신하였지만 그가 망명하여 나에게 온 날부터 그에게 허물이 없었다고 하면서 블레셋을 위해서 싸울 것이라고 변호를 합니다.

그러자 블레셋 방백들이 화를 내면서 다윗이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이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되어 싸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사람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던 그 다윗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가 사울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라고 다윗을 돌려 보내야 한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6절을 보면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말을 하는데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한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아기스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가서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였기 때문에 다윗이 믿는 하나님의 사심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정직하여 나에게 온 날부터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나와 함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내 생각에는 좋지만 블레셋의 방백들이 너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시킬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블레셋 방백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도록 평안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을 보면 스스로는 피할 수 없는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는 상황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열어 주심으로 다윗이 자기 백성과 싸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람들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아마 다윗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9절을 보면 아기스의 말에 다윗이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말이 블레셋을 위하여 사울과 싸우지 못하게 하느냐고 반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이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혹시 이스라엘과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된 것을 기뻐하는 내색을 보일 경우 아기스의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말에 아기스는 다윗이 자신의 목전에 하나님의 전령 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안다고 말을 하면서 오히려 다윗을 달래고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참전하지 못하게 한 블레셋 방백들을 탓하면서 다윗에게 그와 함께 한 사람들과 함께 날이 밝거든 새벽에 떠나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고 아기스에게도 전혀 의심을 받지 않고 당당하게 시글락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가 말한 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자기 사람들과 함께 블레셋 진영을 떠나 시글락으로 돌아갑니다.

블레셋 진영이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편 139편을 보면 다윗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로다’

 

다윗이 어디에 있더라도 주님의 오른 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비록 블레셋 진영에 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서도 다윗을 지켜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경험하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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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6:13-25  찬송가: 455장

 

하나님께서 사울과 삼천명의 군사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다윗과 아비새는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이 진을 치고 있는 산 반대편으로 건너가 사울이 쫓아 올 수 없도록 멀리 산꼭대기에 선 뒤에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비넬을 부릅니다.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고 다윗이 소리를 지르자 그 때까지 잠을 자고 있던 아브넬이 깨어나서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윗이 아비넬을 불렀는데 아비넬이 ‘누가 왕을 부르냐’고 대답을 한 것은 아비넬이 자신을 왕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외침으로 사울이 잠에서 깼기 때문에 왕의 잠을 깨우는 너는 누구냐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왕을 지켜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아브넬을 향하여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다’고 책망을 합니다.

 

아브넬이 왕을 지키지 못한 잘못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죽어 마땅한 일’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고 말을 합니다.

 

죄 없는 다윗을 죽이기 위해 왔지만 정작 그 더 중요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보호해야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윗의 아브넬을 향한 책망의 말씀을 보면서 마치 영적 잠에 빠져 우리의 주님되시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책망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다하여 지켜야 할 믿음을 붙들고 살고 있는지요?

아니면 엉뚱한 것을 쫓거나, 영적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 정작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을 방치해 두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아브넬에 대한 다윗의 책망이 영적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진 우리를 깨우는 말씀이 되어 생명 다해 지켜야 할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의 음성을 알아들은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고 말을 합니다.

사울은 다윗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머리 곁에 두었던 창과 물병이 없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 다시 죽을 뻔한 위기였음에도 다윗이 자신을 살려 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맺었던 언약을 지키지 않고 다윗을 죽이려고 온 자신의 부당한 행동에 대해서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놓고도 뻔뻔하게 다윗에게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울을 보면 다윗이 자기를 살려 주었을 때만 다윗에게 ‘내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놓고 기회가 또 주어지면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이중성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라고 말을 하는데 자신의 사울을 죽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죽이지 않았고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는 책망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울을 ‘내 주로’, 자신을 ‘주의 종’으로 표현을 하면서 여전히 자신은 사울의 백성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9절을 보면 다윗은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이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기 원하나이다’라고 하면서 사울을 통해 자신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하나님의 제물이 되기를 원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사람에 의해서 사울이 충동이 되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사울을 충동한 그들은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는데 그들이 다윗을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다윗을 쫓아내면서 다른 신을 섬기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0절은 사울에게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있는 곳이 여호와 앞에서 멀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울로부터 도망을 다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벗어나 타국에서 죽지 않도록 해달라는 의미입니다.

메추라기와 같고 벼룩과 같이 미천하고 왕에게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죽이려고 이스라엘 왕이 직접 수색하러 나올 이유가 무엇이냐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내가 범죄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어리석은 일이었으며 대단히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않겠다’는 다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울의 고백이 다윗을 돌아오게 해서 죽이려는 음모가 아니라 사울의 진심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사울의 고백이 진심이라는데 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진심은 오늘 본문 23절이었는데 사울의 진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윗을 또 죽이려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진심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이 자신의 마음이 악령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지고 왔던 사울의 창을 사람을 보내 가져 가도록 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23절과 2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을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라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향해 ‘내 아들이라’고 ‘복을 받으라고 승리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지만 다윗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손길을 구하며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과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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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6:1-12  찬송가: 310장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엔게디의 한 동굴에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을 때 사울은 다윗과 맹세를 하고 더 이상 다윗을 쫓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는 본거지를 알게 되자 또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사들을 이끌고 올라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십 사람들이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로 와서 사울에게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었다’고 고발을 합니다.

십에서 기브아까지 거리가 약 40키로 정도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다윗이 숨은 곳을 고발하기 위해서 먼 거리를 달려온 것입니다.

 

그동안 사울은 다윗과 맺은 맹세로 인하여 다윗 쫓기를 포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 사람들이 다윗이 숨은 곳을 알려 주자 사울의 마음이 다시 요동을 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윗을 죽이기 위해 다윗을 쫓아 갑니다.

  

사무엘상 23장에서도 십 사람들이 다윗이 숨은 곳을 고발하였는데 다윗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들어오자 또 다시 다윗을 고발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사울이 다윗과 맺은 맹세를 알고도 밀고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다윗을 고발하는 자에게 주는 보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십 사람들 때문에 사울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고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삼천 명의 군사들 이끌고 십 광야로 내려가 하길라 산 길 가에 친을 치게 된 것입니다.

 

잠언 12장을 보면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어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십 사람들의 고발은 피를 흘리고 언약을 파기하게 만드는 악인의 말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이르렀다는 것을 확인한 뒤 사울이 진을 친 곳으로 내려 가는데 6절을 보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 둘을 데리고 내려갑니다.

 

다윗은 아히멜렉과 아비새에게 누가 자신과 함께 사울의 진영에 내려가겠느냐고 하였을 때 아비새가 함께 가겠다는 말을 합니다.

 

사울의 진영에 내려갔다 자칫 공격을 받으면 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두 명의 용사 가운데 한 사람 만 데리고 가서 만약의 경우 다윗과 함께 있는 남은 사람들을 지킬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윗은 아비새와 함께 밤에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 가는데 사울을 중심으로 군대 장과 아브넬과 군사들이 사울을 둘러 누워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8절을 보면 아비새가 다윗에게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꽃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아비새의 말에는 맹세를 파기하고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왔기 때문에 사울을 죽여도 무방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기회가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나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을 보면 ‘다윗은 아비새에게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는 말을 합니다.

 

사울이 다윗과의 맹세를 어겼지만 사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도망자의 삶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앞에서, 사람들에게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정당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할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도 사울이 죽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심판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신다’고 말을 합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비새에게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 만 취하라 그리고 우리는 그냥 가자’고 말을 합니다.

 

12절을 보면 사울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아무도 다윗이 온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잠이 들었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칫 사울을 죽이도록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다윗은 환경과 상황을 보고 판단을 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판단을 한 것입니다.

물론 상황과 환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울을 한 번을 살려 주었는데 약속을 파기하고 또 다시 자신을 죽이러 온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완벽한 기회가 다시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손으로 사울을 죽이시는 것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상황이나 환경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그렇게 행동을 하도록 주어진 것처럼 보여도 그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는 것입니다.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타협하지 않으려는 단호한 믿음의 결단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실 것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인내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바라볼 줄 아는 영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내가 처한 상황보다, 내가 당하는 고난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우선시되는 신실한 믿음의 결단을 보이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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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5:36-44  찬송가: 430장

 

다윗을 만나 평화를 약속 받은 아비가일은 집으로 돌아왔는데 나발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에게 양털을 깎는 날은 농민들의 추수의 때와 같기 때문에 수확을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잔치를 벌였는데 나발의 잔치가 왕의 잔치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나발의 재산이 왕과 같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발이 자신을 왕처럼 높이기 위한 교만의 잔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호의에 대해서는 거절하며 이기적이었던 나발이 자신을 위해서는 지나친 탐욕을 보이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크게 취하여 마음이 기뻤기 때문에 밝은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비가일이 다윗을 대할 때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남편을 대할 때에도 지혜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37절을 보면 아침이 나발이 포도주에서 깨 후에 아비가일은 다윗과 있었던 일을 말하여 줍니다. 그런데 나발이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낙담하다는 말은 ‘속 마음, 심장이 죽었다’는 의미로 다윗과 사백 명에 의해서 자신과 집안의 모든 남자들이 죽임을 당할 뻔하였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낙담되어 심장이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나발의 몸이 돌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나발의 육체가 돌같이 딱딱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심장이 돌같이 굳어가는 질병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38절을 보면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발이 심장이 돌과 같이 변하는 질병으로 열흘 만에 죽었는데 그의 죽음이 여호와께서 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발의 죽음이 단순한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나발이 행하였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고 교만과 어리석음의 죄악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나발의 모습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은혜의 손길을 거부하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죄악 가운데 거하는 믿음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됩니다.

39절을 보면 ‘다윗은 나의 모욕을 갚아 주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다윗의 고백은 자신에게 모욕을 준 나발을 심판하셔서 고소하다는 의미라기 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찬양이며 하나님의 자녀를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찬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다윗은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람을 보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이 남의 아내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가 나발이 죽자마자 이런 행동을 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에게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다윗의 행동은 미망인이 된 지혜로운 아비가일에 대한 동정과 연민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1절을 보면 아비가엘이 다윗의 제안에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전령들의 발 씻길 종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전령들을 따라가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아비가일에게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올 때 자녀에 관한 말씀이 없고, 만약 자녀가 있었으면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자녀에 대한 책임과 도리를 다하였을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고 말씀하고 있듯이 나발이 죽은 뒤에는 아비가일이 더 이상 남편의 법에 묶인 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 편에서 보면 다윗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도망자의 신세였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이 제대로 없어 나발의 집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는 선처를 구할 정도로 빈궁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다윗을 따라 나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려고 했던 이유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청을 들어주는 다윗의 인품을 보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름 부은 자로서 하나님의 위대한 왕으로 쓰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보다는 장차 올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그의 신부가 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손해인 것 같습니다.

고난이나 핍박과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인격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하나님이 되심을 깨닫고 믿었을 때 현재의 고난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분과 함께 누릴 영광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43절 말씀을 보면 다윗이 또 이스라엘 아히노암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은 한 남편이 한 아내를 만나 연합하는 것인데 다윗이 또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44절에 나오는 말씀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풍습이 일처다부제가 허용되는 사회였기 때문이라 괜찮은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윗이 아히노암을 취하여 아내를 얻은 결과가 선하지 않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44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을 다른 사람의 아내로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아마도 다윗이 이 일로 말미암아 다윗이 감정적인 대응으로 아내를 더 취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히노암의 아들로 인하여 열매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히노함의 아들이 암논입니다.

자신의 이복 누이닌 다말을 강간하고 욕정을 채운 뒤 버림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가정에 피바람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감정적인 대응을 통해 낳은 자식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자신의 이복 동생을 범하는 암논을 낳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아비가일과 같이 겸손함으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신부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또한 베드로전서 5장에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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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5:23-35  찬송가: 401장

 

다윗이 베풀어준 호의를 무시하고 모욕한 나발에 대해서 사백 명 가량을 데리고 올라온다는 소식을 하인 하나가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전해 줍니다.

그러자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에게 말하지 않고 급히 음식을 준비해서 다윗에게로 갑니다.

 

다윗은 올라오면서 ‘내가 나발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주고 손실이 하나도 없게 하였는데 나의 선을 악으로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25절과 26절을 보면 ‘원하옵니다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은 ‘미련한 자, 바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발의 부모가 왜 나발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발의 이름대로 불량하고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보낸 소년들을 자신이 보았다면 나발과 같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다윗의 손에 피를 흘리는 것을 막으셨다고 하면서 다윗의 원수들이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맹세를 합니다.

 

아비가일이 말하는 것을 보면 남편 나발을 저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아비가일의 맹세가 나발이 당할 심판을 예언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보다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에게 보복을 하시는 것처럼 미련한 나발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니 다윗의 손으로 자기 남편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자신이 가지고 온 예물을 다윗의 소년들에게 주라고 하면서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남편의 잘못을 자신의 허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발과 그에게 속한 남자들을 모두 죽이려고 분노의 감정을 품고 있던 다윗에게 자신의 허물 때문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잘못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에게도 분노의 불똥이 튈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허물 때문이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실 것이라고 하면서 다윗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며 악한 일은 찾을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다윗이 죄가 있어서 도망 다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으며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29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찾기 위해서 쫓지만 다윗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생명 주머니로 싸서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을 죽였던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30절을 보면 아비가일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왕으로 다윗에게 기름부으신 일이 이루어질 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아비가일의 청을 들어 주어서 나발을 살려 준다면 마음에 걸릴 것이 없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다윗을 세워 주면서 자신의 남편을 살리려는 아비가일의 지혜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들은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나발에 대한 분노의 감정애 사로잡혔을 때 다윗은 부하들을 이끌고 분노의 대상인 나발을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벌을 받겠다고 말을 하였는데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만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바뀐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합니다.

다윗과 다윗 주위에 칼을 차고 있는 400명 앞에서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로 인하여 다윗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뜻을 돌이키게 만든 것입니다.

나발과 그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던 다윗의 분노를 잠재우고 피의 복수를 막은 아비가일의 지혜를 징찬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평화를 선언합니다.

35절을 보면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였다’고 말을 합니다.

 

아비가일 뿐만 아니라 다윗이 죽이려고 했던 나발과 그 집의 모든 남자들이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는데 아비가일의 지혜로운 말로 인하여 다윗은 분노의 감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고 나발과 그 집의 남자들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불의 혀처럼 온 몸을 더럽히며 죽이는 독을 내뱉는 것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이 지혜로움이 담겨 있는 말이 되어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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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4:1-15  찬송가: 218장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숨었다는 소식을 듣자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찾으러 갑니다.

23장에서는 군사들을 다 이끌고 다윗을 붙잡으러 갔는데 블레셋의 공격을 대비할 수 없게 되니까 이번에는 특별히 선출한 정예병들만 데리고 다윗을 붙잡으러 간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을 보면 정말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잡기 위해서 여기 저기 찾아 다녀야 하고, 블레셋과의 전쟁도 해야 하고,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쉴 틈 없이 다윗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사울의 바쁨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 없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을 죽이기 위한 바쁨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인생은 다윗을 죽이기 위함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사명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바쁘게 살면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바쁨이 사울과 같은 바쁨이라고 한다면 전혀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고, 쓸데 없고 헛된 곤고한 인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잃어버린 자의 삶은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사울과 같은 인생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과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곳은 사해로 내려가는 비탈길로 이곳에 동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3절을 보면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갔는데 다윗과 그의 사람들도 그 굴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군사들과 함께 동굴들을 수색하고 있었는데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르렀다는 말은 그곳에 있는 굴을 수색할 차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일행들은 이 동굴에 숨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 지역에 동굴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울의 추격이 빠르고 맹렬하여 포위망을 피해 빠져 나갈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내린 긴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굴이 숨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사울의 군사들도 동굴을 우선적으로 수색할 것이고 만약 동굴에 숨은 것이 발각된다면 더 이상 빠져 나갈 길이 없다는 것을 다윗도 알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윗이 숨은 곳이 수색을 당할 차례가 되었는데 갑자기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갑자기 설사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급한 용변을 보기 위해 군사들을 먼저 보내 수색할 겨를도 없이 사울 혼자서 동굴에 들어간 것입니다.

개혁한글과 원문을 보면 사울이 ‘발을 가리우러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변을 보기 위해 앉으면 겉옷이 발을 가리기 때문에 은유적인 표현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갑작스런 생리적인 현상 때문에 위기에 몰렸던 다윗이 반대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4절을 보면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말씀은 동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도망을 다니던 다윗에게 선지자를 통해서 주셨던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상황과 맞는 것 같으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라고 다윗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의 신하들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손에 넘겨 주셨으니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을 죽이면 다윗 뿐만 아니라 다윗을 따르던 자신들도 더 이상 도망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부하들의 말이 옳다고 여겨서 일어나 사울에게로 다가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5절에 다윗이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마음이 찔렸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단순히 옷자락을 벤 것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울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마음의 찔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6절을 보면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부하들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다윗이 과연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도록 허락하셨나보다 생각을 하고 칼을 가지고 사울에게 갔는데 그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를 죽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사울을 죽이기 위해 일어났던 자신에 대해서 마음이 찔려 사울을 죽이지 않고 대신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말씀이 사울을 죽여도 된다는 하나님의 허락의 말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진 줄 모르고 볼일을 다 보고 굴을 나가는 사울을 다윗이 부르며 그에게 절을 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참 지혜롭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사울을 충동한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사울에게 돌리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사울로 인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사울을 자극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사울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신의 존경과 사랑을 표시하면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자신에게 악이나 죄가 없기에 왕을 해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그 죄과에 대한 보복을 하실 것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습니다.

다윗은 13절에서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는 옛 속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악을 행하지 않는 이유가 악인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왕을 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재차 강조합니다

 

14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과 같은 존재로 표현을 하면서 이스라엘 왕이 헛된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1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하면서 자신의 상황이 억울하지만 하나님께서 공정한 판단을 통하여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에 실수와 죄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윗은 자신이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믿음의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판단에 맞기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의 삶의 결단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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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3:15-29  찬송가: 368장

 

다윗은 도망을 다니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일을 하거나, 자신을 죽이러 오는 사울의 군사들을 기습하여 공격하는 일도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주신 사명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사울을 죽여 자신이 도망자로서의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짖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하나님의 사명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위기를 피해 도망 다녀야 하는 상황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의 시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 요나단과의 만남은 다시금 믿음을 재충전하는 은혜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만난 요나단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다윗이 하나님을 더욱 힘있게 의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데 힘든 상황이 계속되면 믿음이 약해지고 하나님을 붙잡기보다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세상 것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이 당시 다윗의 마음도 약해져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요나단과 같이 믿음을 독려하는 동역자를 통하여 다시금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붙잡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을 독려하는 동역자가 있어야 더욱 더 힘있게 하나님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 믿음을 더 약하게 만드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다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은혜의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위로하며 삶의 중심과 믿음의 지표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요나단과 같은 믿음의 형제가 있었기 때문에 도망자로서 삶을 살았지만 다윗의 믿음의 푯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의 더욱 의지하도록 용기를 줄 수 있고 위로의 말을 줄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고 말을 합니다.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왔을 때 요나단도 함께 동행을 하였는데 다윗을 죽이기 위한 동행이 아니라 다윗을 구하기 위한 동행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요나단은 사울이 다윗을 찾지 못하도록 혼선을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십사 람들의 고발로 다윗이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질 뻔 하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아마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와주었다가 사울에게 제사장들을 몰살당했던 일과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약탈을 받아 괴롭힘을 당하던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해 주고 그일라에 머물렀을 때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갔던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도와주었다가 잘못하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고발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수도 있지만 백성들은 다윗 때문에 내가 위함할 수 있다고 여기자 다윗이 자신들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사울에게 고발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이 마을 근처에 숨어 있다는 것을 고발하면서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겨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까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다윗을 신고하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변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나만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 입장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나만 바라보는 사람은 거울을 눈 앞에 두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울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거울 뒷 편에 있는 다른 사람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고발한 십 사람들에게 여호와께 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축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 없이 나에게 도움을 주었으니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나 악신에 사로잡힌 사울,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자신의 욕심과 교만한 행동으로 죄악을 범하는 사울의 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는 것은 위선인 것입니다.

 

사울의 축복은 아무런 능력과 효력이 없는 허공을 치는 메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2절과 23절은 사울이 십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다윗이 교활하게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교활하게 잘 도망을 다니기 때문에 너희가 자세히 살펴보고 그가 숨어 있는 것을 정확하게 나에게 알려 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 숨어 있어도 그를 찾아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십 사람들은 사울보다 먼저 앞서서 다윗을 찾아 나섭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의 포위망에 걸려 들었고 사울이 다윗을 에워싸 피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랬을 때 27절을 보면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한다’는 보고를 하자 사울은 어쩔 수 없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갑니다.

 

사울이 다윗을 에워싸고 거의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범하도록 하시면서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블레셋을 방어할 수밖에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는 다윗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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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3:1-14  찬송가: 214장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로부터 도망을 가고 쫓기는 상황에서도 기도를 통해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말씀입니다.

1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한다’는 소식을 다윗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나가기 전에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다윗의 사람들이 반대를 하고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라고 하면서 반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을 따라 다닌 사람들의 숫자가 13절을 보면 600명 정도였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사울의 군대를 피하여 숨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만약 블레셋과 싸우겠다고 나갔다가는 블레셋 군대의 공격 뿐만 아니라 사울의 공격 때문에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블레셋을 치러 가지 말자는 제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 간에 서로 다른 이견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니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의 뜻을 따르자니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랬을 때 4절을 보면 다윗은 다시금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합니다.

다윗이 다시금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확신이 아니라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다시금 확인한 다윗은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러 그일라고 갔고 승리하여 그일라 주민들을 구원하게 됩니다.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확인하는 기도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다윗의 기도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이루어 가기 위해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능력의 기도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약탈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던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과 그와 함께한 사람들이 블레셋과 싸워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함으로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과 일행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며 자신들의 땅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하였을 것입니다.

사울을 피해서 도망을 다니던 다윗 일행들은 모처럼만의 편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일라에 머물렀다는 소식을 사울이 듣게 되었고 군사들을 이끌고 그일라로 내려갑니다.

그일라는 문빗장을 걸면 길이 없는 것처럼 포위를 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에게 다윗과 일행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원해준 은헤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다윗 일행이 자신들을 구원해 주었을 때 이들은 다윗과 일행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감사와 호의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다윗 때문에 군사들과 함께 온다는 소식을 듣자 다윗에 대한 고마움은 사라지고 이제 사울이 오면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다윗과 일행들을 사울의 손에 죽게 하는데 내어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사람에게서 만족과 안식을 기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에게 평안과 안식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할 것은 머니 머니해도 머니가 아니고 세상의 권력이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뒤 아비아달이 가지고 온 에봇을 가져 오라고 한 후 하나님께 묻습니다.

에봇에는 우림과 둠밈이 흉패 안에 있었고 민수기 27장을 보면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께 물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다윗은 자신의 판결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판단하시고 결정을 하시는 지에 관심을 가지고 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내려올 것이며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일행들을 사울에게 넘길 것이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느꼈을 배신감은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하여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을 해주었는데 그 은혜를 얼마가 지났다고 다 잊어버리고 사울의 손에 다윗을 넘긴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 있는가 사람들에게 따지기 보다는 그일라를 떠나 또 다른 피신 장소를 향해 떠나갑니다.

다윗은 어쩌면 자신 때문에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에게 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로 그곳을 조용히 떠나기로 작정을 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서운한 감정을 토로하여 그일라 사람들을 힘들게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다윗이 광야의 요세에도 있었고 십 광야 산골에도 머물렀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정처 없이 도망을 다니는 힘들고 어려운 다윗의 처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매일 다윗을 찾아 다니는 집요함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4절 후반부에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피하는 곳이 결코 안전한 곳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형편을 아시고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도망다니는 상황에서도 죽음의 위험가운데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들로 인해 힘들게 된 상황에서도 다윗 요동치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만 바라며 살았기 때문이며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을 통하여 평안과 안식,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시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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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0:35-42  찬송가: 393장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된 요나단은 다윗과 약속한 장소에서 그 사실을 알려 줍니다.

서로에 대한 우정이 남달랐고 믿음의 동역자였던 요나단과 다윗은 사울의 질투와 미움 때문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의 특징은 서로의 사이를 갈라 놓고 찢어 버리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요소라고 한다면 질투는 사람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이후로 이제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만나지 못하는 사이가 되고 맙니다.

사무엘상 23장에서 도망치는 다윗이 요나단과 십 황무지 수풀에서 잠깐 재회하는 것을 빼고는 두 사람의 만남은 더 이상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요나단과 다윗이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힘을 합쳐 이스라엘을 위하여, 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함께 합력하여 일을 하였더라면 이스라엘이 얼마나 더 강력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마 더 크고 더 위대한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한 사람의 질투로 인하여 이런 기대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질투와 미움은 사람과의 관계를 갈라 놓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16절을 보면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시기와 다툼에서 파생되는 것은 땅의 것이요, 정욕에서 비롯된 것이며 귀신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와 다툼이 사울의 행동과 부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되는 행동을 하며, 자신의 권력의 욕심, 정욕에서 비록된 것이고, 악령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울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보이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들이, 명성이 어떤 한 사람 때문에 빼앗겨 갑니다.

 

결국 내가 누리는 왕의 자리까지 빼앗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우리의 모습이 사울과 같이 시기와 질투와 분노의 감정으로 반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윗만 없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되찾고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다윗을 미워하고 적대시 하며 더 나아가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 때문에 사울이 품었던 질투와 미움의 마음을 언제든 품을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질투와 미운 감정들이 들어올 때 야고보서 3장을 보면 ‘자신을 드러내려고 말하지 말고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 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과 약속했던 시간에 아이 하나를 데리고 나갑니다.

그리고 화살을 아이의 위로 지나치게 쏜 다음 아이 뒤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화살이 네 앞쪽에 있지 아니하냐’

이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하였다는 의미였습니다.

 

요나단이 아이를 성읍으로 돌려 보낸 후 41절을 보면 ‘다윗이 바위 남쪽에서 일어나 엎드려 세 번을 절한 후에 서로의 입을 맞추고 서로 우는데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정과 믿음을 함께 나누었던 서로에 대한 헤어짐으로 슬퍼하고 있지만 이들은 평안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간구하며 맹세를 합니다.

 

42절 말씀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도망자로 살아가야 하는 다윗을 위해 요나단은 평안을 빌고 있습니다.

이 평안은 샬롬의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평안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자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위치에 놓여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바른 진리를 깨달은 자가 누릴 수 있는 은혜가 평안인 것입니다.

 

또한 다윗과 요나단은 절대 끊어지고 변하지 않는 서로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위로를 하고 언약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신실하게 이어져 가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23장에서 잠깐 만나는 동안에도 다윗과 요나단은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확인하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있는데 신명기 10:2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신실한 언약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는 것은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자신들의 약속이 하나님의 이름에 망령되지 않는 신실한 약속의 실행을 이어가겠다는 다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언약을 목숨을 다해 지켜 나감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신실함을 증명해 나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공급하시는 평안을 나누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해 보이며 살아가는 다윗과 요나단 같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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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0:24-34  찬송가: 337장

 

오늘 본문을 보면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끈질기고 계획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다윗은 들에 숨었고 초하루가 되매 왕이 앉아 음식을 먹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월 초하루에는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되는데 짐승의 첫 소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처럼 매월의 첫째날을 하나님의 드리는 희생의 의미와 죄에 대한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을 감사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날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면서도 삶은 전혀 예배자의 삶과는 다르게 자신의 욕망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는 다윗을 죽이려는 행동을 보이는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마저 자신을 위해 다윗을 죽이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은 단창으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고, 다윗의 집에 전령을 보내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미갈의 도움으로 다윗이 피할 수 있었고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으로 도망을 갔는데 사울은 포기하지 않고 전령을 보내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나중에는 사울이 직접 다윗을 잡으려고 라마 나욧으로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계획이 계속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하나님에 대하여 신실한 다윗의 믿음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을 한 것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 다윗이 매월 초하루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 때 다윗을 붙잡아 죽이려는 계획을 하였던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가 생기면 사람의 이성이 분별력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영적 분별력마저 마비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난 후에 왕은 신하들이 함께 식사를 하였는데 평상시 때처럼 모두 자기 자리에 앉았는데 다윗의 자리만 비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그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다윗에게 무슨 사고가 있어 부정하게 되어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둘째 날이 되었는데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요나단에게 ‘이새의 아들이 어찌하여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않는 것이냐’고 질문을 합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말한 것처럼 ‘우리 가족이 그 성읍에서 제사할 일이 있기 때문에 제사에 오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을 하자 30절과 31절을 보면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면서 거친 말을 쏟아 냅니다.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 요나단 때문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는데 해서는 안될 험한 말을 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가 날 때 해서는 안될 말까지 하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사울처럼 자녀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거침 없이 쏟아 내거나 책임을 전가하며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게 ‘그가 죽을 일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행하였습니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사무엘상 19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할 때 요나단은 다윗을 변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지 아니하였고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며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큰 구원을 이루셨는데 무죄한 피를 흘려 범죄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그 때 ‘사울은 요나단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자신의 약속을 깨버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윗을 변호하는 요나단에게 욕설을 내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3절을 보면 ‘사울이 요나단에게 단창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사울이 요나단을 치려고 단창을 던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단창을 던진 것은 아니라 단창을 던져 죽이려는 시늉을 했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분노가 다윗을 지키려는 요나단에게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기로 결심한 사울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4절을 보면 ‘심히 노하여 식탁에서 떠나고 둘째 날에는 먹지 아니하였는데 그 이유가 그의 아버지가 다윗을 욕되게 하였음으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하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상태는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닫쳐져 있고 자신에 대해서 어떤 충고도 견디지 못하고 분노를 드러낼 정도로 악령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아버지의 옳지 못한 행동에 기꺼이 다윗을 변호하였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죄악된 행동에는 분노하였으며 다윗을 위하여 슬퍼합니다.

 

요나단의 행동이 사울이 보기에는 자신의 왕권과 그 뒤를 이을 요나단의 안녕을 흔드는 위험한 모습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는 의를 위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는 신실한 자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누구를 기쁘게 하는 삶이 되고 있는지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의를 위하여 믿음으로 반응하며 살아가는 신실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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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0:12-23  찬송가: 391장

 

오늘 본문 12절을 보면 다윗을 들로 데려간 요나단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언하시거니와’라고 말을 하고 있는데 원문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증언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요나단이 하나님께 맹세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요나단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아버지를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한데도 네게 알리지 않는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 아버지가 네게 악을 행하기를 기뻐하신다면 내가 그것을 네게 알리고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나님께 맹세를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것처럼 너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다윗을 축복합니다.

 

그러면서 다윗과 맹세를 맺는 내용이 14절과 15절 말씀인데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내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게 하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3장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고 말을 하고 사무엘상 24장에 사울도 다윗에게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고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것을 사울도 알고 요나단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사무엘에게서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다윗을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지켜 주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면서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심판하실 때 자신과 그의 자손들에게 인자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며 언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게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으며 하나님께서 다윗의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요나단이 다윗과 맹세를 하는 이유를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맹세를 보면 하나님의 뜻이 그 중심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자기와 후손들에게 인자를 베풀어 달라고 맹세하기 때문에 자신의 안위를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라면 요나단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의 뜻은 자신에게 오히려 손해가 되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사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왕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 다윗을 죽여서 자신이 당하게 될 불이익을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마음이 전혀 없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는 자신과 그의 자손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맹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우리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 우리는 어쩌면 사울과 같이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는 사울이 아닌 요나단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요나단은 초하루에 다윗이 보이지 않으면 사울이 다윗이 왜 자리에 없는지를 자세히 물을 것이라고 하면서 다윗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해 줍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는 사흘 동안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요나단이 과녁에 화살을 쏘는 것처럼 화살을 날린 후에 아이를 보내 화살을 찾으라고 하면서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쪽이라’는 단어가 ‘저쪽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윗의 뒤쪽에 화살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의미는 사울이 다윗을 죽일 의도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는데 자신의 말에 전혀 거짓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에게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고 말을 한다면 ‘너는 네 갈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라’고 말을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너를 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23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였다’는 것입니다.

 

너와 나의 맹세는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에 절대 변하지 않는 언약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요나단의 결단과 믿음을 볼 수 있으며 자신의 언약을 신실히 지켜 나가는 요나단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뜻과 나의 욕망 가운데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어떤 파도와 강풍이 밀어 닥친다 하더라도 반석 위에 세운 집과 같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은혜를 맛보아 깨닫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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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20:1-11  찬송가: 86장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믿음의 선진들 옆에는 그와 함께 뜻을 함께 하는 동역자들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아론과 훌이 있었고, 다니엘에게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뜻을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며 바울에게도 디모데와 같은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는 친구이며 신실한 믿음의 동역자였던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9장을 보면 악령에 들린 사울은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이 자기 집으로 도망을 가자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서 전령을 보냅니다.

다윗은 미갈의 도움으로 사무엘이 있는 라마나욧으로 도망을 갔는데 사울은 포기하지 않고 쫓아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성령님께서 사울이 보낸 사람들에게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케 하여 예언을 하게 함으로 다윗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자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이 라마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을 만나게 되는데 요나단은 사울과 함께 기브아에 살고 있었기 다윗이 요나단을 만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사울이 있는 기브아로 갔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을 찾은 다윗은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요나단에게 ‘너네 아버지 왜 그러는 것이냐’고 따지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계획을 다윗에게 알려 주었는데 다윗에 라마 나욧에 있을 때 사울이 전령을 보냈던 일은 요나단을 통해 듣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 사울이 했던 일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2절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에게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 하리라 함이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말을 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요나단에게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말을 하지 않은 이유가 다윗이 죽으면 요나단이 너무 슬퍼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죽음 사이가 한 걸음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토로합니다.

 

그러자 요나단은 ‘네 마음이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요나단에게 있어서 다윗을 살려주는 것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유익보다 오히려 손해가 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는 일에 방해가 될 수도 있고,

다윗을 살려 줌으로 아버지 사울의 신뢰를 잃어 버릴 수도 있으며,

오히려 다윗을 숨겨주는 일이 드러나게 되면 자신에게도 심각한 피해가 올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요나단은 다윗의 어려움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고 다윗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매월 첫째날, 월삭, 초하루에 드리는 상번제와 속죄제를 언급하면서 그 때 제사가 끝나면 다윗이 왕을 모시고 함께 식사를 해야 하는데 셋째 날 저녁까지 참석하지 않고 들에 숨어 있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이 다윗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으면 다윗이 온 가족이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되어서 베들레헴으로 급하게 갈 수 있게 허락을 구하였다고 대답하라고 합니다.

 

그 때 사울의 말이 좋다고 하면 다윗이 평안하겠지만 만약 사울이 노한다면 다윗을 죽이려고 결심한 것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절을 보면 다윗은 요나단에게 ‘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고 말을 하면서 내게 잘못이 있다면 나를 사울에게 데려가 죽게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요나단의 손에 죽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 일이 결코 네게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확실히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와서 그것을 네게 이르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다윗은 요나단에게 만약 사울이 엄하게 네게 대답하여 나를 죽이려고 계획을 하였다면 들에 숨어 있는 나에게 누가 알려 주겠느냐고 말을 하자 요나단은 다윗에게 들로 가자고 하면서 어떻게 알려 줄 것인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의 감당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앞에 놓이는 어려움들이 있으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려는 사울과 같은 대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때 믿음의 동역자들이 함께 힘을 합하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다윗과 요나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믿음의 동역자인 요나단을 통하여 사울의 위협에도 생명을 지킬 수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다윗과 요나단과 같기를 기대합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고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길에 합력할 수 있는 믿음의 동역자들 말입니다.

 

주님의 영광교회가 이런 믿음의 동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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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8:17-30  찬송가: 260장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이 갑작스럽게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음에도 오랜 시간 동안 지연을 했지만 자신의 공약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의 맏딸 메랍을 다윗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겉으로는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기를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말을 하였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손을 대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다윗을 죽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여호와의 싸움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다윗을 죽이려는 악한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자신의 딸도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사울에게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족이나 내 아버지의 집이 무엇이기에 내가 왕의 사위가 될 수 있겠느냐’는 말을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계략을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23절을 보면 실제로 왕의 사위가 되기에는 자신이 가난하고 천하기 때문이라는 겸손에서 나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9절을 보면 ‘사울의 딸 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홀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딸을 주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한 것은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다윗을 전장에 보냈고 당연히 다윗이 전장에서 죽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딸을 아드리엘에게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다윗이 죽을 줄 알고 딸 메랍을 아드리엘에게 주었는데 다윗 계속 전쟁에서 승리하니까 이제 자신의 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0절을 보면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자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긴 이유를 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려고’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미갈이 다윗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자 이것을 또 다른 기회로 생각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고 말한 뒤 신하들을 통해 왕의 사위가 되는 것에 대해 다윗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보게 하는데 23절을 보면 신하들의 말을 들은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작은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윗이 왕의 딸과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로 자신이 왕의 딸을 데려오기 위해 필요한 지참금을 준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신하들을 시켜 ‘왕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 백 개를 원하신다’는 말을 전하게 합니다.

결혼하기 위해서 남자는 결혼 지참금을 준비해야 하는데 블레셋 군사 백 명을 죽여 포피를 가져오는 것으로 대신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군사 백 명을 죽이는 일을 행하며 죽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게다가 죽은 블레셋 사람들의 포피를 가져 오라고 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을 할례받은 자처럼 만들어 모욕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것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아마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이 자신을 사위로 맞이한다고 하였을 때 자신과 화해하기 위한 행동으로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부하들을 데리고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포피를 가져다가 그 수대로 왕에게 바칩니다.

 

사울의 모든 계획이 다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윗에게 자신의 딸 미갈을 아내로 줄 수 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고 음모하였음에도 오히려 다윗이 더 뛰어나게 일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고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았고 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회개하며 돌아서야 하는데 사울에게서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사울의 인생에는 회개가 없이 이유와 변명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9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을 두려워하면서도 다윗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비하는 헛된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에 30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이 싸우러 나오면 그들이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심히 귀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세상의 권력과 힘을 가진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내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은 사울의 모든 신하들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여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전쟁터로 내보내면 내보낼수록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의 지혜로 그의 이름이 더욱 존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바냐 3장을 보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너희로 천하 만민 중에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자에게 주시는 능력의 말씀인 줄 믿습니다.

이런 능력과 은혜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우리의 삶이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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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8:10-16  찬송가: 325장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령을 부리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악령이 순종하여 일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악령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의미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있게 내리다는 말은 ‘돌진하다’는 의미로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혀 이상을 상실한 사울에게 악령이 돌진하여 그를 억압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사울은 집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떠들어 댔다’는 단어를 보면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되었을 때 예언을 했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의 말이 아무 말이나 떠들어 댄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악령에 감동이 되는 말들이 그의 입술을 통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이 되었을 때는 예언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모습을 보였던 반면에 악령에 사로잡혔을 때 나오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다윗을 죽이기 위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을 치료하려고 다윗이 수금을 수금을 타는데 사울이 자신의 손에 있는 창을 던져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합니다.

다윗이 창을 피하자 사울은 다시 한 번 창을 던져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질투에 분노하는 사울을 사로잡은 악령은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사단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사단의 가장 큰 목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모습은 마치 요한복음 13장에서 가룟유다에게 들어간 사단이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를 통해 사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예수님을 죽이면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단의 공격에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계략을 멸하실 뿐 아니라 최후 승리를 얻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두 번이나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사울의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납니다.

 

12절 말씀은 사울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피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두려움은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13절을 보면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군대의 장관이었던 다윗이 천부장이 되었다는 것은 계급이 강등시킨 것입니다.

나라의 중심지인 왕궁에서 다윗을 변방으로 쫓어내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변방으로 보내 전쟁터에서 죽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뻔 하였는데 예전의 명성과 지위를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처럼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억울함과 절망감이 충만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을 보면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말씀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왕궁이던 변방이던, 군대의 장관이던 천부장이던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고 두려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16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사랑하였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다윗이 자기들 앞에 출입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출입 곧 나가고 들어왔다는 단어는 다윗이 충실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들에는 ‘양육하다, 구원하다, 짊어지다’ 등 여러 가지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변방으로 쫓겨난 다윗이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뿐 아니라 백성들을 양육하고, 구원하며, 그들의 짐을 짊어주는 모습을 보임으로 사랑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 다윗의 삶의 열매들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찬미했을 때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말씀하며 그들을 통해 구원받는 사람을 주께서 더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황과 어려움이 우리의 인생을 흔들어도 다윗과 같이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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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8:1-9  찬송가: 92장

 

오늘 본문은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과 다윗을 질투하는 사울에 관한 말씀입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떠오른 다윗에 대하여 요나단은 자기 생명같이 사랑을 하게 된 반면 사울은 그런 다윗에 대하여 분노하며 질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자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생령과 같은 단어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다는 단어는 ‘함께 공조하다, 더 강하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요나단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골리앗을 죽이고 사울 앞에 선 다윗에 대하여 영적 친밀감을 느꼈으며 믿음의 우정을 강하게 나누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코드가 맞는 동역자를 만날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생명을 의미하는 단어도 ‘생령’과 같은 ‘네페쉬’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자신의 궁에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다윗이 사울에게 수금을 탈 때는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 필요할 때만 왕래를 하였다가 이제는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는 장수로 왕궁에 상주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언약을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지만 요나단이 다윗의 생명을 지켜주고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모셋을 돌보아 주는 것을 볼 때 서로의 안녕과 후손들을 지켜 줄 것에 대한 언약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언약은 나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신실하게 이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요나단과 다윗은 서로 함께 하기 힘든 경쟁 관계였다고 할 수 있으며 요나단에게 다윗만 없었다면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사울이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을 때 모른척 하고만 있었어도 이스라엘의 모든 권력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정말 자신의 생명과 같이 다윗을 지켜 주고 다윗과 맺은 언약에 대해서 신실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로 요나단이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크리스천들이, 믿음의 동역자들이 보이는 신실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언약의 성립을 확인하는 징표로 자신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당시 요나단이 입었던 겉옷은 사울 왕의 후계자이며 왕자임을 표시하는 겉옷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자신의 겉옷과 무기를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은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후계자가 다윗이 될 것을 예표하는 말씀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나단은 자신이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표현한 일이지만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실 일에 대한 예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마음과는 반대로 사울은 다윗을 향한 질투의 불씨가 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울이 다윗을 신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을 왕궁에 머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다윗에게 일을 맡기고 다윗이 지혜롭게 행하자 사울은 다윗을 군대의 장을 삼았습니다.

그런 사울의 결정에 대해서 온 백성들과 신하들이 합당히 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신뢰와 믿음이 한순간에 질투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 대해서 충성하는 마음이 약해진 것 때문도 아니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 반역의 기미를 보인 것도 아니라 백성들의 노래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데 가사 내용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그 노래를 들은 사울이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라고 불쾌하여 심히 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사울에 대한 충성과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노래 한 곡 때문에 다윗에 대한 사울의 신뢰와 믿음이 무너진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보면 다윗이 전쟁을 통해 이룬 업적이 사울이 이룬 것보다 더 많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불렀을 것입니다.

 

사울은 민심이 다윗에게로 돌아서는 것 같고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자신에게 사무엘이 왕의 나라가 길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를 삼겠다는 말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불순종하였던 사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했을 때 사울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여서 내가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나를 인정 안할지라도 내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인정해 주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처럼 보이면 그만이라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을 때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사울이 백성들의 다윗을 더 높이니까 싫어하고 분노하며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사울 왕이었더라도 자기 부하를 더 높이는 노래를 듣는 것이 좋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런 모습은 하나님을 믿는 자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 정욕에 사로집힌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요나단과 같이 믿음의 동역자로 서로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사울과 같이 말 한마디에 질투하고 분노하여 분노의 화살을 날리는 사람입니까?

요나단과 다윗과 같은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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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7:50-58  찬송가: 447장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물멧돌로 죽인 다윗은 골리앗을 밟고 골리앗의 칼로 머리를 잘라 버리는데 이 모습은 마치 창세기 3장에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말씀과 골로새서 2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는 말씀을 연상케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의 권세 사단의 권세를 멸하시는 승리의 십자가이며 그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고 영생의 기쁨을 얻은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승리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른 것은 단순히 다윗이 가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승리였던 것입니다.

 

어제 말씀을 보면 다윗은 골리앗을 향하여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하면서 골리앗에게 물맷돌을 던졌고 그것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완전 무장한 골리앗의 이마에 돌을 던진 것은 다윗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돌이 이마에 박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쓰러진 골리앗에게 달려간 다윗은 골리앗의 칼로 그의 머리를 잘라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이것은 단순히 다윗만의 승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승리가 되었고 하나님의 승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골리앗과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 줄 믿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베자 블레셋 군사들은 도망가기 시작합니다.

 

52절을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는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면서 진멸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리앗이 40일 동안 조석으로 나와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고 모욕하면서 했던 말은 ‘한 사람을 내게로 보내 그가 싸워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만일 내가 이기어 그를 죽이면 너희가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죽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은 약속한 대로 이스라엘의 종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내걸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려는 속임수였던 것입니다.

 

블레셋 한 사람 때문에 두려움에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다윗 한 사람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가 죽이는 용감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주님의 역사는 한 사람만 믿음으로 바로 서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음에도 골리앗 한 사람 때문에 모두가 두려워했지만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골리앗 앞에서 선 다윗 한 사람으로 인하여 승리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것도 중요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일어서는 한 사람이 있느냐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으로 인하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진영을 노략하였으며 다윗은 골리앗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골리앗이 입었던 갑옷은 자기 장막에 두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승리의 승전가를 예루살렘에까지 전하였던 반면 이어지는 55절을 보면 사울의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골리앗과 싸우겠다는 다윗을 만났었고 자신의 갑옷을 벗어 주려고 했으며 다윗을 보내면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는 말까지 했음에도 다윗이 누구인지를 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악신이 들렸을 때 수금으로 치료해 주고 자신의 무기든 자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사울이 악신이 들렸을 때 이성이 마비되어 사물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며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당연히 질 것으로 생각하여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은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오는 다윗을 사울에게 데리고 갔는데 사울은 여전히 다윗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이 떠나 악신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영적 분별력이 사라져 버린 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8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에게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고 묻자 다윗은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윗이 말한 ‘주의 종’은 ‘사울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주의 종이라고 대답을 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다윗으로 인한 승리임에도 자신의 공이 아니라 종의 주인인 사울로 인한 것이라고 사울의 공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한 다윗의 모습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나가는 다윗 한 사람을 통해 골리앗과 블레셋 군대를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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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7:1-11  찬송가: 300장

 

사무엘상 14장을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 진영에 들어가 싸움을 시작하면서 벌였던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지만 사울의 이기적인 맹세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을 완벽하게 무찌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으로부터 다시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블레셋 군대가 유다에 속한 지역으로 들어와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사울도 군사들을 소집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블레셋과 대치를 하게 됩니다.

 

그랬을 때 4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나왔는데 그의 이름이 가드 사람 골리앗’이었습니다.

 

골리앗의 신상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의 키는 여섯 규빗 한 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금으로 하면 약 2m 70cm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몸에는 비늘 갑옷을 있었는데 그 갑옷의 무게가 놋 오천 세겔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을 kg으로 환산하면 약 57kg정도라고 합니다.

 

또한 다리에는 놋 각반을 쳤는데 각반은 정강이를 보호하는 갑옷을 의미합니다.

또한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엇으며 창 자루는 베틀 채 같고 창날은 철 육백 세겔이며 방패 든 자가 앞서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날의 무게만도 7kg정도가 된다고 말씀을 합니다.

 

골리앗의 외형적인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은 골리앗에게서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전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외형적으로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거대한 전사가 이스라엘과 싸우자고 도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군대를 보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고 골리앗 혼자 나와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그가 서서 이스라엘 군대를 향하여 외쳐 이르뢰 너희는 한 사람을 택하여 내게 내려 보내라 그가 나를 죽이면 우리가 너희의 종이 되겠고 내가 이겨 그를 죽이면 너희는 우리의 종이 되어 우리를 섬기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옛날 군대가 싸우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고 말을 하기도 하는데 성경의 전쟁에서는 처음 등장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섯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먼저 겁을 주는 이유는 이전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땅을 진동케 하심으로 패배를 하였던 경험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골리앗이라는 완전 무장한 거인이 우는 사자처럼 이스라엘 군대를 위협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블레셋 군대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대적들도 우리를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골리앗을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사울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사울의 키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싸울 수 있는 무기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을 이끌어야 할 왕 사울은 골리앗의 말에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골리앗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사울이 ‘하나님을 찾았다’거나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는 말씀이 전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울의 전쟁을 보면 패배가 없었습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도 결국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습니다.

 

사울은 전쟁의 승리를 자신의 공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욕심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전쟁에서 승리를 하니까 이제는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는 하나님을 찾거나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골리앗 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신명기 31장을 보면 가나안과의 전쟁을 앞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고 말씀한 다음 그 이유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이라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 주심을 믿을 때 우리의 대적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두려움이 생기는 원인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불신앙에 대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블레셋에 대해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사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사들 모두가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더 두려워 할 때 동일하게 나타나는 무기력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우리 앞에 골리앗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승리케 하시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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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6:14-23  찬송가: 408장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왕이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똑같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을 받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모습을 비교를 한다면 사울과 다윗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컸습니다.

다윗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사울은 이스라엘 중에 가장 뛰어난 신체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지금 왕의 자리에서 모든 힘과 권력을 가진 자였고 다윗은 그저 양을 치는 목동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무엇을 가졌고 무엇을 누리고 있는지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였느냐 아니면 떠났느냐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13절 말씀을 보면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영이 크게 감동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도 기름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1장을 보면 사울이 하나님의 영이 크게 감동되었을 때 그는 예언을 하였고 새사람이 되는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이 사울을 떠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신약시대와는 달리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의 임재하심이 머무르기도 하시고 떠나기도 하시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사울이 왕이 되고 난 다음 자신이 누리는 권력과 부귀, 명예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이 되니까 가질 수 있는 것 다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 다 누릴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사울을 교만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 없게 여기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사로잡아 번뇌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리시는 악령은 사단의 영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악령이 하나님의 부리심을 받는다는 말씀은 악령이 하나님의 사명과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단이나 귀신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으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바운더리 안에서 제한적인 활동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뇌케 하였다는 단어를 보면 두렵게 하다는 의미와 제압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악령이 사울을 제압해서 괴롭힘으로 사울이 심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신하들이 사울에게 제안을 하는 것은 음악을 통한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악령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에 대하여 18절을 보면 ‘수금을 탈 줄 알고 용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23장을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잘 타고 노래를 잘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외적인 부분보다 그 중심이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준비해야 할 재능 계발에는 소홀히 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쓰임 받고 싶어는 하는데 정작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할 때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쓰임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인정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자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가진 재능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며 또한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일에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 이하를 보면 다윗이 사울의 병기 든 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 수금 타는 것을 통해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떠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쾌하여 나았다는 말씀은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23절 말씀이 사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악령에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에는 자결하여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는 비참한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또한 23절 말씀은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함께하는 다윗이 자신의 재능으로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을 회복케 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하였던 것처럼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재능을 통하여 영혼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다윗과 같이 사람을 치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쓰임 받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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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6:1-13  찬송가: 455장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임의대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의 나라가 길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백성의 지도자로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사울의 나라를 곧바로 무너뜨리지 않으신 것은 사울을 향한 경고를 통하여 사울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15장을 보면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진멸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멜렉 왕을 죽이지 않았고 짐승들 가운데 좋은 것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을 실행에 옮기시는데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슬퍼한 것은 그래도 자신의 손으로 기름을 부었는데 죄악을 행하는 사울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통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슬픔과 안타까움 때문에 하나님의 사명을 지체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 사무엘을 보내리니 그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명이 사무엘에게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새로운 왕을 선출하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법을 알려 주시는데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면서 이새를 제사에 청하면 사무엘이 행할 일을 가르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며 내가 알게 하는 자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이 나에게 두려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사명자가 보여야 할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하러 왔다고 한 뒤에 이새와 그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청하게 되는데 이 때 사무엘도 외형적인 모습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왕을 보았다고 하셨고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6절을 보면 이새의 아들들이 왔을 때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판단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무엘도 인간인지라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실 때 보았던 기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조건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런 사무엘에게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하고 가치를 먹이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압을 ‘버렸다’고 하셨는데 사무엘은 그를 보고 ‘과연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이 사람이다’고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무엘도 그런 생각과 판단을 하였다면 우리도 얼마나 하나님과 다른 생각과 다른 판단을 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중심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볼 수 없다는 말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게 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음성이었는지 마음의 소리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은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귀가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의 생각으로 엘리압이라 판단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엘리압을 지나게 하였고 다른 아들들도 지나게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곱 아들들이 다 지나갔고 이제 사무엘의 눈 앞에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이새의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새에게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질문에 이새는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양을 지키고 있다는 대답을 합니다.

 

막내, 말째 라는 단어는 작다, 어리다,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이새의 말을 다윗은 너무 작고 어리고 중요하지 않은 막내이기 때문에 그를 본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말이었습니다.

 

이 당시 다윗의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3-15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형들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연약한 다윗이었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형들보다 외형적으로 작지만 중심에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또한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었는데 이것은 다윗의 왕위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음과 다윗이 왕의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은 자칫 외형적인 판단으로,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실수를 저지를 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자신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계속적으로 붙들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다윗을 찾아 그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이루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외형적인 모습에 치중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거룩하고 청결한 마음을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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