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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4:24-35  찬송가: 391장

 

오늘 말씀은 잘못된 말과 맹세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그릇치는 과오를 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벽한 승기를 잡고 블레셋을 섬멸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이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피곤하였다는 말은 곤란한 상황에 빠져 들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아갔던 요나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손기를 내밀어 주셨고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힘을 합하여 블레셋 군대를 무찌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의 잘못된 말, 맹세로 인하여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사울은 왕의 권한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지키도록 맹세를 시켰는데 그 내용은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자신의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은 왕으로서의 어떤 능력이나 권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에게서 왕이 망령된 행동을 하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대가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왕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를 앞에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흩어지고 군사들은 육백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을 공격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으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으로 인하여 블레셋 군대가 요통을 치고 도망을 가니까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전쟁의 승리가 자신의 공적인 것처럼 백성들에게 맹세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맹세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사울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판단에 따른 것이 문제였습니다.

 

믿음으로 나아간 요나단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사울은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에 사울이 한 일이라고는 별로 없으면서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한다’고 하면서 전쟁의 승리를 자신의 공인 것처럼 돌리면서 내 전쟁에서 내가 승리를 거둘 때까지 누구도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맹세를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이 맹세로 인해 정작 곤란을 당해야 할 블레셋 사람들은 도망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가 고파 적을 무찌를 수 없는 곤란한 지경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백성들의 안위와 걱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없었습니다.

그저 전쟁에서 자신을 최대한 부각시키고 나의 승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백성들이 어떤 상태가 되든지 상관 없고 하나님도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울의 맹세 때문에 백성들은 저주받을 것이 두려워 땅에 흐르는 꿀도 먹는 자가 없이 블레셋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백성들이 블레셋으로부터 빼앗은 짐승들을 피채 먹으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27절을 보면 사울의 맹세를 모르는 요나단은 배가 고파 지팡이에 꿀을 찍어 먹게 됩니다.

사울의 잘못된 맹세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블레셋과 싸웠던 요나단에게 저주의 굴레를 씌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굴레에 갇혀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이 실족하며 우리의 잘못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치 못하도록 막는 일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온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시킨 맹세로 인하여 블레셋을 더 살륙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4장 후반부를 보면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다는 말씀은 블레셋을 철저하게 짓밟을 수 있었음에도 사울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백성들이 배고프던지 죽던지 상관 없이 그저 이 승리가 자신의 승리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욕심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군사들이 고기를 피째 먹었다는 말을 듣지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문제를 만들어 놓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큰 돌을 굴려 오라고 한 뒤에 그 돌 위에서 소나 양을 잡아 먹고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단을 쌓으면서도 사울은 자신이 백성들이 범죄하지 않는 것까지 배려하는 거룩한 왕으로 보여지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자신의 죄는 감추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척하는 위선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 사울과 같은 죄성이 드러날 때 다른 사람을 실족케 만드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경계하며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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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4:1-23 찬송가 357장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한 사람 요나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울의 망령된 행동으로 사무엘이 기브아로 가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육백 명 가량 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 제대로 된 무기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사울과 요나단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군사들이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군사들과 병거와 마병이 있는 블레셋 군대로부터 승리를 거둘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상황을 뒤엎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데 그 원인은 바로 믿음의 사람 요나단 한 사람을 통해서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하루는’이라는 단어가 ‘그 날’을 의미합니다.

블레셋 군대가 믹마스 어귀에 진을 친 그날에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고 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단이 사울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블레셋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울이 요나단을 보내지 않으려고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무기를 든 소년만 데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간 것이 호기심이나 무모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말씀을 보면 믿음에 따른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 때로는 사방이 막힌 길을 가는 것 같고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는 길을 열어 주시고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요나단과는 대조적으로 사울은 자신과 한 육백 명과 함께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 머물러 있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블레셋 진영과 이스라엘이 있는 진영에 험한 바위가 있었기 때문에 서로 함부로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6절에서 요나단이 하는 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믿음의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실 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았다는 고백은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능력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무기를 든 사람도 우리 둘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거나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겠다’는 충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단의 계획은 블레셋 사람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였을 때 만일, 그들이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고 말을 하면 그들에게 올라가지 않고 ‘만일 그들이 우리에게 올라오라고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신 표징으로 삼고 그들에게 올라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의 말은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모 아니면 도라’고 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 원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라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그 뜻대로 순종하여 올라가지 않을 것이고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믿음으로 나아가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요나단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었고,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였을 때 12절을 보면 블레셋 부대 사람들이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올라오라 우리의 힘과 능력을 보여 주겠다’는 자신만만한 말이었지만 요나단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무기를 든 자에게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다’고 하면서 험한 바위를 손 발로 기어 올라갑니다.

 

그리고 요나단에게는 무기가 없었가 없었지만 블레셋 사람들을 요나단이 넘어뜨리면 뒤를 따르는 무기 든 자가 칼로 죽이면서 나아갑니다.

 

그렇게 이십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자 15절을 보면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았던 블레셋 군대에서 이십 명이 죽었다고 이런 공포와 떨림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땅이 진동을 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땅에 지진이 일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단 두 명 뿐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역사하시니까 두 명으로도 해변에 모래와 같이 많은 군대를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사울의 파수꾼이 보고 보고를 하자 사울이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확인을 하는데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여 승리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하니까 제사장에게 네 손을 거두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이길 수 있을 것처럼 보이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내 힘으로 승리하였다고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육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올라가는데 블레셋 군사들이 자기들끼리 칼로 죽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편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공격을 하였고 도망을 갔던 백성들도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며 공격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나아간 단 두 명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에 해변의 모래와 같은 블레셋 군대가 있을지라도 능히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의 승리가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의 삶에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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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3:13-23  찬송가: 449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에 대해서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행동이 왜 망령된 행동이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변명이 사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공감이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그의 행동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이 될 수 없는 망령된 행동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명령’이라는 단어는 ‘율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행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은 것을 말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정하신 제사에 관한 말씀을 사울이 어겼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더 맞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론의 자손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선물로 주셨으며 거기 가까이 하는 다른 사람은 죽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제사장에게만 허락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처한 상황에서 그렇게 라도 제사를 하려고 하였던 이유가 충분히 공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블레셋은 코 앞에 있는데 백성들은 블레셋 군대가 두려워 도망을 가고 기다리던 사무엘마저 오지 않은 것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니까 뭐라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는 해야 하는데 사무엘은 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부득이 하게 자신이 제사를 주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저도 사울의 입장이었다고 하면 사울과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울이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린 것이라고 한 말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입장에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울의 행동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도 그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변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농사는 지어야 겠고, 먹고는 살아야 했으며, 풍족해야 하나님께 드릴 수도 있으니..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어쩔 수 없고, 형편이 그렇다고 말을 하면 이유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왕이 된 사울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이 망령된 행동이라고 책망을 하면서 만약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세우실 때 어차피 다윗이 왕이 될 것이기 때문에 사울은 버리는 카드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면 사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쓸모 없이 버리기 위해 만드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장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시고 심판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믿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이유도 버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 통하여 이스라엘 위에 사울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시기 위한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자신의 이유와 상황 때문에 망령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사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울의 모습은 인간이 죄를 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이유와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을 안 지킬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될 수 없으며 죄를 범한 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없으며 결국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께 망령된 행동을 한 사울에게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기브아로 가버립니다.

 

그랬을 때 사울과 함께 한 군사의 수는 육백 명 가량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변의 모래와 같이 많은 군사들과 병거와 마병이 있는 블레셋 군대 앞에서 육백 명은 새 발의 피와 같다고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은 남아 있는 육백 명을 이끌고 길갈에서 베냐민 땅 게바로 이동을 하였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랬을 때 블레셋의 노략꾼들이 세 대로 나뉘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노략꾼은 지금으로 하면 선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교란하기 위한 블레셋은 선발대를 세 대로 나누어 협공을 시도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 전쟁을 하기에는 얼마나 열악한 상황이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철공은 철을 다루는 숙련공을 의미하는데 이스라엘 내에 철공이 없었다는 것은 철을 가지고 기구를 만드는 체철소가 이스라엘에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내에 제철소를 두지 못하도록 했던 이유는 히브리 사람들이 칼이나 창을 만들어 블레셋을 대적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농기구 하나라도 무뎌지면 그것을 갈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버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리다는 말은 ‘날카롭게 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모였을 때 그들에게 칼이나 창과 같이 제대로 된 무기가 없었고 오직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만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블레셋의 본진이 믹마스의 어귀에 이르게 되었는데 어귀는 통로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 통로만 지나면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의해서 패배를 당하는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던 요나단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의 한 사람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시는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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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3:1-12  찬송가: 365

 

사울이 왕이 될 때 그의 나이가 사십 세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1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첫 해에 암몬과의 전쟁을 하게 되는데 사울이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울이 왕이 된지 2년 째가 되었을 때 블레셋과의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암몬과의 전쟁에서는 사울의 군대가 삼십 삼만명의 대군으로 전쟁을 하였는데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이스라엘 군사 삼천 명을 택하고 그 중에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하고 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하였으며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돌려 보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군사들을 모집한 후에 그들 가운데 정예군만 선별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3절을 보면 먼저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수비대를 치게 됩니다’

게바는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었던 지역으로 블레셋은 이스라엘 내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약탈을 하고 내정간섭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블레셋 수비대를 치자 블레셋은 군사들을 모으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군대를 소집하고 올라오는데 5절을 보면 ‘병거가 삼 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인원이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을 쳤는데 이곳의 정확한 지역을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 내에 있는 지역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3절과 4절을 보면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고 블레셋 수배대를 친 것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전쟁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군대를 소집하고 길갈에 진을 지게 됩니다.

 

그런데 6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기도 전에 블레셋 군대의 위용을 보고 겁을 먹고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리고 7절을 보면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을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멸망을 할 것으로 여겨서 가나안 땅을 떠나 요단 강 동쪽에 자리를 잡았던 갓 지파의 땅으로 피난을 가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본진은 아직 길갈에 있었는데 사울과 함께 있는 군사들도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을 보면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정한 기한’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을 보면 ‘정한 기한’이라는 단어가 ‘성회, 절기, 집회’라는 의미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였을 때 사무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주관하기로 사울과 약속되어 있었고 그 정한 날이 7일 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7일을 기다렸는데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블레셋이 두려워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말씀을 보면 사울과 함께 남아있던 백성들이 ‘육백 명 가량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암몬과 전쟁을 할 때 소집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십 삼만 명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하여 사울이 백성들을 소집하였을 때 비슷한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다가 블레셋 군대를 보면 지금의 탱크와 같은 병거만 삼만이었고 마병이 육천에 군사들은 해변의 모래같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듣거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집되어 오다가 요단 동편으로 도망을 가는 군사들이 있었고 또 길갈에 모였다가 사울에게서 흩어지는 백성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사울은 7일 후에 사무엘이 올 것이라고 하면서 기다려 보자고 하였는데 7일이 지나도 사무엘이 오지 않으니까 흩어지는 백성들이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러자 9절을 보면 사울이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고 하면서 ‘번제를 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번제를 드렸다는 주체가 ‘그’, 사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망령되게 행동을 하였다고 할 때 우리는 사무엘과 약속한 날짜를 지키지 않은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7일을 온전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7일이 다 지나기 전에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약속을 어긴 것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랬을 수도 있지만 사울의 망령된 행동은 오늘 본문의 9절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로 가져오라’는 말씀은 ‘나에게 가져오라’는 의미이고 ‘번제를 드렸다’는 말씀은 ‘그가 번제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번제를 자기에게 가져오게 한 다음 번제를 드리는 주체가 사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백성들이 흩어졌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번제를 드린 이유가 하나님께 제사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백성들이 흩어지지 않게 백성들을 붙잡으려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사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야 하는데 백성들을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제사장이 아닌 자신이 주체가 되어 제사를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번제를 드렸을 때 사무엘이 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번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왔다는 말씀이 아니라 사울이 조금만 기다렸으면 사무엘이 왔을 텐데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임의대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별 것 아닌것처럼 태연하게 나가서 사무엘을 문안하였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사무엘이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고 말을 한 것은 사울의 변명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죄악된 행동이었는지를 깨닫게 하기 위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변명을 합니다.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는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번제를 드릴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의 말 중에 틀린 말이 무엇입니까?틀린 말이 없습니다.

사울의 말한 내용과 상황은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임의대로 제사를 주관하였으며,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사인데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백성들을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제사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내 말이 틀리지 않고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망령된 행동이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이었다고 변명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망령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우리의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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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14-23  찬송가: 382장

 

어제 말씀에서 바울은 내가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씀을 하였는데 이 말씀이 자칫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선교 헌금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힘든 형편과 사정에서 어렵게 선교헌금을 한 빌립보 교인들의 수고에 대해서 괜한 수고를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한 일이라’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빌립보 교인들의 선교헌금이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상태를 괴로움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사명이 십자가의 길이며 핍박과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의 괴로움에 빕립보 교인들이 함께 참여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에게 전한 선교헌금이 고난 중에도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사역을 돕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 초기에도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 물질적인 후원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를 떠날 때 바울과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은 교회가 빌립보 교회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빌립보에서 사역을 마친 바울은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데살로니가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은 밤낮으로 일을 하며 복음을 전하였는데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빌립보 교회에서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바울의 쓸 것을 보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두 번으로 끝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단어에는 ‘다시’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두 번만 돕자고 교회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바울의 선교를 돕기 위한 마음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바울의 선교를 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후원이 밤낮으로 일을 해야 하는 바울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17절을 보면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한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의 선교를 돕는 헌금을 하였지만 바울의 기도는 자신에게 물질적인 풍성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이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유익이라는 단어를 보면 ‘로고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계산할 때 회계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대부분 ‘말씀’이라는 단어로 사용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이 단어를 물질적인 풍성한 열매로 표현을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빌립보 교인들의 물질적인 풍성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도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8절에서 바울은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감옥이라는 개념이 지금으로 하면 ‘가택연금’ 정도라 할 수 있지만 로마 경비병들이 지키는 죄수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가 억압되고 모든 것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모든 것이 있고 풍족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모든 것이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을 지불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준 바울을 위한 선교 헌금이 쓰고도 남을 정도로 풍성하게 모두 지불 되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헌금은 단순히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목적이요 용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 필요하니까 헌금을 하거나 선교의 일을 감당하는데 물질이 필요하니까 돕는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일 수 있어도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때 비로서 가치가 있는 예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에게 전한 헌금은 바로 그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9절에서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림은 손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축복의 도구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의 모든 필요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채워 주실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2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풍성한 열매는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인 줄 믿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한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풍성한 열매가 맺어지는 주님의 영광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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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8-13  찬송가: 312장

 

오늘 본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의 말씀입니다.

8절을 보면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무엇에든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부분과 ‘무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무엇에든지’라는 단어는 ‘무슨 일에든지, 최고로 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의미가 있으며 뒤에 ‘무슨’이라는 단어는 ‘만일 어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어떤 덕을 나타내고, 만일 어떤 기림 (여기서 기림은 칭찬을 의미합니다)을 나타낼 일이 있으면 이것들을 생각하세요 그것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참됨과 경건과 의로움과 정결함과 사랑 받을 만하고 칭찬 받을 만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참되다는 말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며 진리로 가득 차 있으라는 뜻입니다.

경건하다는 정직함으로 존경과 공경을 받을 만하라는 뜻입니다.

옳다는 말은 의롭다는 의미로 거룩함과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정결하다는 거짓으로부터 깨끗하고 순결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랑 받을 만하라는 단어는 ‘함께’와 ‘사랑’을 의미하는 ‘필레오’라는 단어가 합쳐진 단어로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칭찬받을 만하라는 말은 ‘좋은 평판으로 칭찬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믿음의 사람들이 덕을 드러내고 칭찬을 듣기 위해서 이것들을 생각하며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9절을 보면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바울이 그냥 말씀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하여 보여진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그냥 말씀만 전하는 자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하면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본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갈 때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빌립보 교인들도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10절을 보면 우리말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그러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는 말씀입니다.

 

당부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을 통해서 크게 기뻐할 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울에게 끊겼던 선교 후원금을 다시 싹이 나도록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비량으로 선교를 하기도 하였지만 바울이 선교에 집중할 수 있도록 빌립보 교회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가 이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아서 지원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다시 싹이 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도 바울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아마 사정과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교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을 향한 사랑과 주님께서 주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선교에 동참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라는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11절 말씀을 보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비를 후원해 준 것이 너무 기쁘고 고마운 일인데 바울이 궁핍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선교 헌금을 계속 지원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에서 선교비를 주었기 때문에 바울이 만족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만족할 수 있는 법을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12절을 보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 말씀 붙들고 살아 가다가 가난하게도 되거나 부유하게도 되든지 또한 배가 부르던지 배가 고프던지, 부유하게 살던지, 가난하게 살던지 주님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어떤 환경이나 상황 가운데 있더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말씀의 원래 의미는 ‘모든 것의 비밀을 전수 받았다’는 뜻입니다.

자기 스스로 비법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비밀을 전수해 주시는 분으로 인해서 자족할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반복하면서 강조하는 것은 ‘주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에게 이런 비밀을 전수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주님 안에서 살아가니까 내가 배가 부르든지 고프든지 돈이 많든지 적든지 기쁨을 누리고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세상 것이, 환경이 만족과 기쁨을 주는 주체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기쁨과 만족의 주체가 되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런 다음 13절을 보면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기 때문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올 모든 상황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능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으면 할 수 있고, 내가 힘이 없고 부족하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주님의 능력의 도구로 쓰임 받을 때 주님의 능력으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일체의 비밀을 배우고 주님 안에 거하며 주님의 능력으로 쓰임 받는 바울의 고백이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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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1-7  찬송가: 412장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러므로’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어제 3장 후반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한 다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믿음의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 서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에서 아시아를 전도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성령님께서 막으시고 지금의 유럽인 마게도냐 사람이 건너오라는 환상을 통하여 건너가서 복음을 전한 첫번째 도시였으며 자주장사 루디아의 집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의 계획이 아니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이끌리어 세워진 유럽의 첫번째 교회였기 때문에 바울에게도 남다른 애정이 있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표현을 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전하면서 성도들이 주 안에서 굳건하게 서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빌립보서 3:2절을 보면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고 말씀하면서 교회 안에 유대교의 율법을 가지고 들어와 율법을 행하고 할례를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할례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개들이라고 행악자들이라고 표현을 할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할례를 행하는 일을 몸을 상해하는 일이라고 말씀하면서 믿음을 통한 구원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극도로 경계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다른 마음을 품고 서로 다투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모두 여자 이름으로 빌립보 교회에서 기둥과 같이 헌신하는 집사들이었을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이들이 무엇 때문에 서로 다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절을 보면 다른 진리로 인하여 다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멍에를 같이한 너는 빌립보 교회의 감독, 목사를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글레멘드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울과 함께 힘을 쓰던 자들이었는데 어떤 이유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다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며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다투지 말고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면서 빌립보 교회의 목사에게 그들을 도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빌립보 교인 전체를 향하여 말씀을 하는데 4절을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씀을 명령형으로 사용하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강제성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기뻐하라는 말씀 앞에 ‘항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항상 언제든지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형편과 사정에 따라 항상 기뻐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기 전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입니다.

 

요 15:9-11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기쁨이 사라지는 원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우리를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대상은 누구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은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인내하지 못하고서는 관용을 베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에게 빚을 탕감해주는 임금의 마음입니다. (마 18)

죄 값으로 죽어야 될 우리들을 용서해 주는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이 관용인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직업입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기도를 쉬는 것을 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여러분을 향한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랬을 때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했던 말씀은 오늘 동일한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며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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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12-21  찬송가: 323장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기록한 서신서인데 사도행전 28장에 바울이 2년 동안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때 기록한 서신서입니다.

사도행전을 바울이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셋집은 바울이 구금되어 있는 집에 대한 집세를 바울이 지불하였다는 의미로 바울이 감옥이 아닌 집에 구금을 당하였고 그 집을 시위대에 소속된 사람들이 지켰으며 방문자들이 면회를 오는 것을 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감옥에 갇힌 사실을 시위대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울이 갇히게 됨으로 인하여 바울을 감시하는 시위대 안에 있는 사람들과 바울을 면회하기 위해서 밖에서 찾아오는 사람들 모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바울을 지키는 간수들이나 경비병들 그리고 밖에서 바울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4절을 보면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더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옥에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니까 그것을 본 믿음의 형제들이 주님을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갇힌 것으로 인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두 종류가 있었는데 15절을 보면 어떤 사람은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투기와 분쟁으로 전하는 사람들은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바울과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

아마 이들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구약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만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에 대하여 구약의 율법을 무시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바울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히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선한 의도로 전하며 바울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다른 이견을 가지고 있거나 바울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바울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하나 좋아하는 마음으로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음으로 구원받는 것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지 내 편이 되어야 하고 자신의 신학적 해석에 무조건 동조를 해야 한다는 것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에도 얼마나 많은 신학적인 해석이 다르고 많은 교파들이 있습니까?

수많은 교파들이 서로 나누어지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갈등이나 같은 말씀을 사람이 다르게 해석하는 문제로 인하여 발생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초대교회 때부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보면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하면서 사람에 따라서 서로 파벌이 생기고 나누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나누어져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으면 좋은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일에 힘을 낭비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와 다르거나 나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될 수 있으면 그것이 나의 기쁨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못 전하는 이단에 대해서는 경계를 해야 하지만 다른 정통 교단을 향하여 누가 맞다고 서로 다투는 것은 복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오직 복음이 증거되고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나와 다르다고 서로 다툴 것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 받는 일이 나에게 기쁨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9절을 보면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영혼 구원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갇힌 바울의 육신이 놓임을 받는 구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매여 있는 육신이 다시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20절 말씀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감옥에 갇히지 전에도 그랬고 지금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도 마찬가지로 바울이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은 복음을 전함으로 당하는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담대함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내가 감옥에서 죽든지 아니면 자유를 얻어 밖으로 나가든지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될 수 있으면 그것이 나의 바램이고 소망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21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이기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도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주님의 영광교회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을 만나느냐가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될 수 있으며 나의 주님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이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믿음으로 성숙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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